‘벌새’를 중학교 2학년 은희(박지후)의 성장 서사로 국한한다면 그것은 너무도 아쉬운 일이다. 이 영화는 꽤 구체적인 시기와 장소를 영화의 배경으로 특정한다. 1994년, 서울의 대치동이다. 그러나 은희의 일상생활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재현되면 될수록 오히려 영화는 보편성을 얻는다. 이것이 세심하게 구현된 미시사의 힘이다.
잉여처럼 보일지도 모를 영화의 첫 번째 장면은 중요하다. 엄마(이승연)의 대파 심부름을 다녀오던 은희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집을 잘못 찾고, 대문 앞에서 원망 섞인 목소리로 엄마를 애타게 부른다. 다시 집을 제대로 찾았을 때 은희가 엄마를 바라보는 표정은 상당히 복잡 미묘하다. 당연히 거기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무언가가 사라져버리는, 나를 둘러싼 세계의 공기 자체가 완전히 변모한 것 같은 이 낯설고도 기이한 체험. 지금 은희가 무의식적으로 품고 있는 불안과 두려움의 또 다른 얼굴일 것이다. 곧 은희는 집 안으로 들어가지만 카메라는 그를 따라 들어가지 않고 서서히 뒤로 물러나며 아파트 전경을 비춘다. 이 오프닝은 은희라는 인물을 소개함과 동시에 은희의 개인사가 객관의 시점으로 확장됨을 암시한다.
영화는 가정에서의 폭력적 구조뿐 아니라 교육 현장의 폭력성 또한 드러낸다. “나는 노래방 대신 서울대 간다”라는 구호를 외쳐야 하는 교실 풍경은 일견 우스꽝스러운 시절의 단면 정도로 치부될 수 있지만, 씁쓸하고 참담하기까지 한 뒷맛을 남긴다.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소외된 은희의 숨통을 터주는 인물은 한문강사 영지(김새벽)다. 은희를 둘러싼 세계에서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사려 깊은 눈을 가진 유일한 어른이다. 영지는 은희에게 자기 존재의 가치를 알게 하고, 무뎌진 폭력 앞에 저항하는 마음을 심어준다. 아프지만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 사랑하지만 들춰내 고발해야 할 것들이 있다. 이 태도는 은희의 세계관을 뒤흔들 뿐더러 영화에 내적 긴장을 안겨준다. 은희의 부모에게 아들의 폭력은 단지 성장기 자녀들 간의 소동일 뿐이겠지만, 한 발 떨어져 바라보면 “증거가 되어줄 진단서”를 끊어야 할 사태다. 나름의 큰 수술을 앞둔 은희가 아빠의 눈물 앞에서 의아해하는 표정이나 숟가락에 고기 반찬을 올려주는 엄마의 친절에 옅게 짓는 미소, 타인의 호의로 가득한 병실에서 오히려 활력을 보이는 모습 등은 박제되듯 하나하나 새겨진다. 지난날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감정들을 무심코 스쳐 지나왔을까.
은희는 성수대교 붕괴로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듯한 거대한 상실을 경험한다. 그리고 기어이 사고 현장을 두 눈으로 목도하러 간다. 영화는 모두가 그 광경을 봐야한다고 대담히 주장한다. 불편해도 고개를 들고, 희미해져가는 그날의 아픔을 똑똑히 기억하라고 촉구한다. 그래야 은희와 우리가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듯이.
그날 은희가 바라보던 것은 끊어진 다리의 공백일까, 아니면 잔해처럼 남겨진 다리일까. 상처 받은 은희를 지켜주던 영지의 그 고요한 눈빛이나 흥얼거리던 멜로디의 쓸쓸함, 감자전을 먹는 은희를 지켜보던 엄마의 눈빛이 남긴 안온함, 아빠와 오빠가 갑작스럽게 쏟아낸 눈물의 의미. 영화는 이를 관통해 거실에서 발견된 유리 조각이나 귀밑의 수술 자국처럼 그럼에도 명백히 상처가 존재했음을 각인시킨다. 세계의 단절과 균열 앞에 속절없는 분노나 한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다시 바라보고 보듬고 나아갈 것인가에 대해 묻는다. 세계를 지탱하는 힘은 바로 거기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렇기에 ‘벌새’는 한없이 서늘하고도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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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민(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