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전문가, 아티스트, 장르 팬 할 것 없이 입을 모으는 답이 하나 있다. “힙합을 알리고, 힙합 아티스트가 노출될 수 있는 제대로 된 창구가 없다.”라는 것. 일견 맞는 듯 보인다. 드렁큰 타이거의 ‘Good Life’가 TV 가요 순위 프로그램 최초의 랩/힙합 1위곡이 된 지 무려 20여년 가까이 되어가지만, 한국에서 힙합은 오랫동안 마이너 취급을 받아왔다. 1998년에 KBS에서 제작한 ‘KBS 제3지대: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가 오늘날까지도 한국 힙합을 기록한 유일무이한 지상파 다큐멘터리로 거론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쇼미더머니’ 이전에 방송에서 접할 수 있는 힙합 음악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런데 과연 이 같은 현실이 힙합에만 해당되는가? 알앤비, 록, 재즈, 일렉트로닉 등등,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한국의 미디어가 무관심하여 다루길 꺼려하거나 외면한 건 비단 힙합뿐만이 아니다. 다른 장르 신의 상황도 매한가지다. 아이러니하게도 마니아층이 두터워지고 장르 커뮤니티가 활성화됐던 ‘쇼미더머니’ 이전의 힙합 신은 타 장르 신보다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그러니 앞서 언급한 답은 이렇게 바꿔야 타당하다. “예전부터 한국 미디어 중엔 (아이돌을 제외한)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아티스트를 노출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창구가 없었다.”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착취와 탈취의 역사의 실제 피해자이기도 한 힙합 아티스트들은 본인들이 만들어낸 고유한 문화를 왜곡하거나 가치를 훼손하는 행위에 매우 민감하게 대응해왔다. 멀게는 백인 사업가들의 힙합 시장 진출에 맞서 흑인이 주인인 레이블과 미디어를 만들어낸 것, 가깝게는 타인종 래퍼들의 진입에 매우 까다롭게 반응하는 것 등이 좋은 예다. 심지어 같은 흑인 아티스트라 하더라도, 힙합을 왜곡하거나 가치를 깎아내리는 행위엔 가차없이 비판을 가하고 설전을 벌인다. 시대가 바뀌면서 래퍼들의 가치관도 변했지만, 힙합을 향한 외부 공격(?)엔 예나 지금이나 아티스트가 앞장서서 맞서왔다. 이는 의식적으로 사수하려 한 것보다 자연스레 발현된 쪽에 가깝다. 미국에서 힙합은 흑인 개개인의 삶은 물론, 그들의 사회, 문화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19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힙합의 4대 요소가 사실상 해체되고, 2000년대 들어 완전한 주류 대중음악이 되었지만, 문화로서의 근간이 여전한 건 이 같은 이유에서다.
무엇보다 래퍼 대부분에게 신이란 공동이 일군 문화의 터전이기에 앞서 생계를 해결하기 위한 공간이다. 직장이란 소리다. 그래서 힙합에 대한 왜곡이나 가치 훼손이 개인의 생계 문제에 영향을 끼치지만 않는다면, 굳이 나서서 힙합 수호자를 자처할 이유도, 의지도 없어 보인다. 더구나 지금은 왜곡에 순응하고 힘을 보태야만 연명할 수 있다. 멋지게 랩을 뱉는 것도 중요하지만, 멋지게 랩을 뱉지 못하더라도 어떻게든 이목을 끌어 인지도를 높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
물론, 여전히 많은 래퍼들이 힙합과 신의 가치를 논한다. 그러나 접점이 희미하다 보니 공허한 말들만 맴돌다 사라진다. 더구나 그들 대부분이 ‘쇼미더머니’에 투신한 현실은 한국 힙합 신에 만연한 래퍼들의 자기기만만을 확인케 한다. 돌이켜 보면, 한국 힙합 신을 주도하는 이들이 힙합을 왜곡하고 저급한 시스템을 구축한 ‘쇼미더머니’를 기회의 땅으로 삼기 시작한 순간부터 이미 게임은 끝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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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한국 힙합이 ‘쇼미더머니’ 하나에 휘둘리게 된 것은 애초부터 한국 힙합의 가치나 멋을 지켜야 할 아티스트들의 명분이 없었기 때문 아닐까. 그렇다면, 방송 프로그램 하나가 지배하는 작금의 현실이 한국 힙합의 본모습이라 해도 이상할 건 없다. 설령 내일 당장 ‘쇼미더머니’가 끝난다 해도 이 같은 현실은 바뀌지 않을 것이고, 추후 제2의 ‘쇼미더머니’가 나온다면, 똑같은 수순을 밟을 것이다. 한국 힙합은 딱 그 정도 수준인 것이다. 어쩌면 우린 아주 오랫동안 ‘힙합은 문화’라는 허상 속에서 허우적거려 온 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