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근본적인 질문까지도 거슬러 올라가보자. 한국 대중음악계의 상황이 그렇다고 해서 한국 힙합을 위한다는 미명 아래 장르와 문화의 근간을 뒤흔드는 행위가 타당한 것인가? 또한, 온갖 왜곡과 자극적인 연출 덕에 대중화가 된다 한들 이른바 ‘행사 머니’를 버는 래퍼와 래퍼 지망생들 외의 이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아니, 애초에 그런 방식을 통해서라도 힙합을 대중화시켜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난 그것이 그토록 절실한 당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진짜 원인은 외부가 아니라 한국 힙합 신 내부에서 찾아야한다. 최초 힙합이 탄생한 건 파티장이었지만, 그 배경엔 특수한 사회환경이 깔려있다. 인종과 계급 이슈를 빼놓고는 힙합을 논할 수 없다. 세대에 걸쳐 백인들이 가한 억압과 차별은 흑인 사회가 강력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이유이자 원동력이 됐고, 그 안에서 힙합은 음악을 넘어 흑인들만의 문화로서 움트고 발전했다. 그렇기에 힙합은 한국에서 자유로 통하는 것과 달리 래퍼 로이스 다 파이브나인(Royce Da 5’9”)도 말한 것처럼 매우 편향적이고 폐쇄적인 장르다.
한국에서의 상황은 다르다. 힙합은 단지 대중음악의 여러 장르 중 하나일 뿐이다. 한국의 많은 래퍼들과 팬들 역시 ‘힙합은 문화다!’를 외쳐왔지만,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 사이에 미국으로부터 힙합이 전파되며 이식된 맹목적인 구호나 다름없다. 당장 ‘쇼미더머니’에 나오는 유명 래퍼들 중에 “어째서 힙합이 (한국에서도) 문화인가?”라고 물었을 때 제대로 답할 수 있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실제로 미국 힙합과 비슷하게 문화로서 뿌리내렸던 신은 프랑스, 독일, 영국처럼 인종적 갈등, 빈민가, 갱 등의 요소가 갖춰진 극소수의 나라뿐이다. 이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나고 자란 한국의 래퍼들에게 힙합과 문화의 상관관계는 모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 보니 한국에서 힙합을 문화로서 논하자면, ‘십대, 혹은 젊은 세대를 대변하는’ 정도의 피상적인 얘기에 그치고 만다.
무엇보다 래퍼 대부분에게 신이란 공동이 일군 문화의 터전이기에 앞서 생계를 해결하기 위한 공간이다. 직장이란 소리다. 그래서 힙합에 대한 왜곡이나 가치 훼손이 개인의 생계 문제에 영향을 끼치지만 않는다면, 굳이 나서서 힙합 수호자를 자처할 이유도, 의지도 없어 보인다. 더구나 지금은 왜곡에 순응하고 힘을 보태야만 연명할 수 있다. 멋지게 랩을 뱉는 것도 중요하지만, 멋지게 랩을 뱉지 못하더라도 어떻게든 이목을 끌어 인지도를 높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
물론, 여전히 많은 래퍼들이 힙합과 신의 가치를 논한다. 그러나 접점이 희미하다 보니 공허한 말들만 맴돌다 사라진다. 더구나 그들 대부분이 ‘쇼미더머니’에 투신한 현실은 한국 힙합 신에 만연한 래퍼들의 자기기만만을 확인케 한다. 돌이켜 보면, 한국 힙합 신을 주도하는 이들이 힙합을 왜곡하고 저급한 시스템을 구축한 ‘쇼미더머니’를 기회의 땅으로 삼기 시작한 순간부터 이미 게임은 끝난 셈이었다.
결국, 한국 힙합이 ‘쇼미더머니’ 하나에 휘둘리게 된 것은 애초부터 한국 힙합의 가치나 멋을 지켜야 할 아티스트들의 명분이 없었기 때문 아닐까. 그렇다면, 방송 프로그램 하나가 지배하는 작금의 현실이 한국 힙합의 본모습이라 해도 이상할 건 없다. 설령 내일 당장 ‘쇼미더머니’가 끝난다 해도 이 같은 현실은 바뀌지 않을 것이고, 추후 제2의 ‘쇼미더머니’가 나온다면, 똑같은 수순을 밟을 것이다. 한국 힙합은 딱 그 정도 수준인 것이다. 어쩌면 우린 아주 오랫동안 ‘힙합은 문화’라는 허상 속에서 허우적거려 온 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