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투데이

배우 이지은의 계절

김리은 ize 기자 2019.08.21 05:27
의견 남기기

글자크기





tvN ‘호텔 델루나’에서 회마다 화제가 된 장만월의 의상은, 요컨대 현재로 재현하는 과거다. 챙이 큰 모자나 오드리 햅번을 연상시키는 왕관처럼 과장된 취향, 짙은 원색이나 레이스를 활용하는 고전적인 의상, 그리고 비녀와 같은 액세서리의 활용은 과거의 감각을 현재의 방식으로 재현하는 것에 가깝다. 이는 오랫동안 유예되었던 장만월의 계절을 현재로 소환하는 ‘호텔 델루나’의 이야기를 시각적인 이미지로 옮긴 것이기도 하다. 이지은이 연기하는 장만월은 저승으로 가는 망자들의 쉼터 ‘호텔 델루나’의 사장이지만, 정작 자신은 삶과 죽음의 주기 바깥에 놓인 채 같은 모습으로 천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았다. 마고신(서이숙)이 장만월에 대해 “여전히 저 아이는 가득 차 있구나”라고 한탄하듯, 돌이킬 수 없는 원한과 후회로 스스로를 채운 장만월은 시들 일도 꽃필 일도 없이 말라붙은 시간을 견딘다. 시간은 흘렀지만 기억은 과거에 묶여있다. 그 사이 입어야 할 옷도 바뀌었지만 이제는 ‘클래식’이 돼 버린 옷 입는 취향도 변하지 않는다. 영원할 것 같은 젊음 뒤로 입는 옷에, 행동에, 표정에 지난 시간의 흔적이 조금씩 뿌려져 있다. 세상사에 통달한 듯한 냉소와 함께, 배우 이지은이 천 년을 살아온 장만월을 현실로 소화하는 방법이다.

“‘이지은 아니면 이 작품 하지 말자’는 이야기도 했다” ‘호텔 델루나’의 오충환 감독이 제작발표회에서 전한 캐스팅 일화다. 단지 가수 아이유의 유명세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의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와 마른 체구는 특정 연령대와 무관한 인물을 설득하기에적합하다. 이지은에게는 1980년대 노래인 산울림의 ‘너의 의미’를 불러도 이질감이 없는 20대 뮤지션 아이유의 정서가 있다. 살아온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장만월은 이지은이 대중 앞에서 쌓은 독특한 커리어와 겹친다. 20대 중반에 이미 한국 대중음악사의 몇 페이지를 채울 업적과 영광을 홀로 받아낸 아티스트. 그의 위엄은 천 년을 살며 델루나 호텔에서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장만월을 납득시킨다. 상대방을 압도하는 장만월의 무표정한 모습은 아이유를 주인공으로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옴니버스 영화 ‘페르소나’ 중 ‘썩지 않게 아주 오래’의 은과 유사하다면, 호텔 지배인 구찬성(여진구)에게 짜증을 부리는 모습은 KBS ‘프로듀사’에서 까다로운 인기 가수 신디를 연상시킨다. 과거의 악연으로 얽힌 이미라(박유나) 앞에서 파멸로 치달을 것을 알면서도 분노를 통제하지 않는 얼굴은 tvN ‘나의 아저씨’의 악만 남은 이지안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한다. 장만월이 지닌 천 년의 흔적은 가수 아이유가 쌓아온 아우라가 있어야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아이유는 배우 이지은으로서 겪은 경험들을 통해 장만월의 캐릭터를 구체적으로 만들어 나간다. 요컨대, 장만월은 가수 아이유의 존재감 안에서 조용히 성장하던 배우 이지은이 아이유와 만난 교차점이다.

조숙한 아이가 될 수 밖에 없었던 10대 시절을 절절하게 묘사하며 현재로 소환하는 ‘싫은 날’이나 “그날의 반딧불을 당신의 창 가까이 보내는" ‘밤편지’의 가사처럼, 가수 아이유로서의 이지은은 유독 시간에 대해 예민한 감각을 보여줬다. 노래를 통해 그는 과거의 고통을 현재의 감정으로 되살려 내고, 반대로 현재의 이 순간을 마치 오래 전에 대한 회고처럼 소화한다. 흘러가는 시간을 잡아 때로는 과거와 현재의 구분조차 무의미하게 하는 가수 아이유의 고유한 감각은 장만월과 그의 시차를 없앤다. 오랜 세월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거나 사치로 가리는 데 익숙했던 장만월은 구찬성으로 인해 감정의 동요가 생길 때마다 이를 극도로 절제한다. 호텔의 해변에 찾아온 구찬성에게 장만월이 “난 좀 슬퍼졌어. 아까 보던 바다보다 지금 보는 바다가 더 예뻐져서”라고 고백하는 순간조차 그의 벅찬 감정은 오직 눈동자 안에만 고여있다. 그러나 구찬성과 연애를 하게 된 장만월이 그와 함께 떡국을 먹으며 웃고, 그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을 인정하며 “꽃이 지고 있는” 자신의 상태를 고백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는 더 이상 자신의 기쁨이나 슬픔을 가로막지 않고 있는 그대로 터트린다. 천년의 회한으로 스스로의 감정마저 혐오하던 이가 새롭게 찾아온 계절을 받아들이고, 그 뒤 낙화처럼 뒤따를 작별을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한다. ‘호텔 델루나’에서 장만월을 상징하는 나무가 오랫동안 죽어있는 것처럼 보였다가 꽃을 피운 것처럼, 이지은은 오랜 시간 동안 회한에 잠긴 사람의 체념과, 그가 다시 타인에게 감정을 쏟아낼 때의 변화를 잡아낸다.




‘호텔 델루나’ 초반 방영분에서 이지은이 일정한 어조의 말투로 표현한 장만월의 캐릭터는 다소 어색하다는 반응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지은은 천 년 동안 감정을 통제해온 이 비현실적인 존재의 독특한 캐릭터를 보여준 뒤, 구찬성과의 만남을 통해 감정이 변화하는 순간을 포착했다. 이지은은 다른 사람과 다른 장만월의 시차를 이해한다. 그리고 장만월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어 운영하면서 마치 장만월이 현재에 존재하는 사람인 것처럼 몰입하도록 만들었다. 사람들이 장만월에 호응을 보내기 시작한 뒤, 12회 엔딩 이후 장만월의 시점으로 작사하고 노래한 OST ‘Happy Ending’을 불렀다. 캐릭터에 가수로서 자신의 아우라를 입히고, 배우로서 여러 캐릭터로 연기를 만들어 나가던 이지은은, 이 순간 자신과 장만월의 존재를 일치시켰다. 자신의 인스타그램에서 저녁 약속을 취소하고 ‘호텔 델루나’ 12회를 시청하라면서 “12부는 전설이 될 것”이라 예고했던 것을 증명하듯, 이날 시청률은 10.4%(닐슨 코리아 기준)로 자체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다시 첫 문장으로 돌아가면, 장만월은 이지은의 현재로 재현되는 과거다. 이지은은 천 년을 살아왔지만 여전히 미성숙한 비현실적인 존재에 자신의 이미지와 경험을 덧붙이고, 과거를 애도하지 못하는 그의 생을 이해하며, 자신이 가진 채널과 자질을 모두 활용해 장만월을 현실에 존재하게 한다. 사람이 흘러가는 시간을 잡을 수는 없다. 하지만 가끔은 그럴 수 있다고 믿고 싶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지금 이지은이 보여주는 환상이다. 자신이 장만월에게 가져다 준 새로운 계절과 함께, 배우 이지은이 맞이한 새로운 계절이다. 흘러가는 시간의 어디 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달라진
나의 의견 남기기 등록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