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또는 스태프였을 때부터 여성들은 현장을 바꾸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영화학과 졸업생 B는 2013~2014년 재학생 성비가 동등해질 무렵 학교에서의 남성중심적 문화가 점차 완화됐다고 말했다. 그는 “학교에선 돈이나 시간 모두 부족하기 때문에 최소한의 환경에서 촬영하는데, 소수자인 여성 스태프들은 화장실, 숙소 등 여러 측면에서 배제됐다”라고 회상했다. “대상화된 시선이나 말이 쏟아져요. ‘그냥 같이 자자’, ‘대충 저기 가서 볼일 봐’ 같은 농담을 다들 재밌다고 하는데 정작 여자들은 웃을 수가 없는 거죠. 이런 불편들은 남자 선배들이 많았던 기수가 졸업을 하고 점점 성비가 같거나 여학생이 더 많아지면서 조금씩 줄어들었어요.” 2017년 이후 촉발된 ‘미투’도 기폭제가 됐다. 피해자가 계속해서 가해자와 만나게 되거나, 문제 해결 대신 피해자 배제와 사건 은폐를 일삼았던 현장은 조금씩 변해갔다. 학생들은 SNS를 통해 성폭력 피해 사실을 고발하고 만연한 성차별을 공론화했으며 자발적으로 성평등위원회를 열었다. 촬영 전 성평등 강령을 세우고 제작진 전부가 낭독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기록하는 등의 방안도 마련했다. 독립영화 현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은정 감독은 영화 제작 과정에 대해 “현장에서 감독이 가진 권력을 인지하고 성차별, 성희롱,성폭행이 없는 현장을 만들고 싶었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 피해자를 외롭게 만들지 말고 제작을 멈추는 한이 있더라도 피해자 편에 서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라고 밝혔다. 임순례 감독이 센터장을 맡은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은 지난해 3월 개소 이후 성폭력 예방교육, 피해자 상담 및 지원 등 산업 내 성평등을 위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상업 영화에서도 여성 인력, 특히 여성 감독의 숫자가 늘어나야할 또다른 이유다.
여성 감독 개개인의 노력이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관련 지원 사업과 정책, 함께 일하는 영화 산업 내부의 협조가 동반돼야 한다. 올해로 21회를 맞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20년 동안 여성 서사에 주목하고 여성 창작자들을 지원해왔다. 활동 중인 여성 감독 중 박찬옥, 이경미, 전고운 등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발굴한 감독들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만 봐도 창작자를 위한 ‘기회의 장’과 전폭적인 지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누군가는 왜 그래야 하느냐고 하지만, 사실 이것은 최소한의 ‘생존장치’예요.” 권은선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부집행위원장은 “영화 자체가 너무나 기울어진 운동장이기 때문에 바로잡을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판 같은 역할을 하고자 했다. 이 영화제만이라도 여성 영화 인력에 집중하고 시상을 통해 정당한 평가를 돌려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1년에 한 번 있는 축제 외에도 프로그램 아카이빙, 교육 프로그램, 지역 상영회 등 문화적으로 영향력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획을 진행 중이다. 이는 지방자치단체, 영진위를 비롯한 기관, 기업을 주체로 한 사업에 적용 가능한 모델이기도 하다. 권은선 부집행위원장은 “여성의 경험, 삶에 대해 말을 거는 이야기, 그런 여성들의 서사를 개발하고 또 관객들이 계속해서 인식적인 쾌락을 경험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중요하다”면서도 “연속체처럼 묶여 있는 영화산업 전반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정책적인 장치, 비용 지원, 비평 등이 함께 가야한다”(라)고 말했다.
쿼터제(동수제) 도입과 같은 양적 평등 정책의 필요성도 대두되고 있다. 개인 창작 능력에 의존하는 영화의 특성상 모든 결과를 개인의 능력이나 사정으로 치부하기 쉽다. 여성 영화인들 사이에서도 ‘여성 전체가 능력이 없어서 도움이 필요한 존재로 잘못 인식되는 것은 아닐까’, ‘실력이 좋았다면 이런 도움을 받을 일도 없을 텐데’라는 자책과 우려가 존재한다. 그러나 통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구조의 문제는 개인의 노력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조혜영 영화 평론가는 “추상적인 지지보다는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캠페인이 절실하다. 대기업이 여성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을 위한 피칭 프로그램을 만든다든가 영진위와 MOU를 맺어 협력하는 등 과감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대중에 인지도가 높은 영화계 유명인사의 동참도 중요하다. 영화 관계자 C는 “박찬욱, 봉준호처럼 유명한 감독이나 배우들이 방송 인터뷰 같은 데에 나가서 성평등을 위한 캠페인을 벌이는 것도 효과적일 것”이라며 “표준계약서를 체결하고 시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화장실, 출산 휴가, 육아 보장 등을 당연한 권리로서 보장해야 한다”라고 했다.
영화산업 내에서의 성평등은 인권적 차원을 넘어 시장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꾸준히 지적받고 있는 한국영화의 천편일률적인 플롯과 장르 편중을 해소하려면 다양성을 확보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남성중심적으로 구축된 기존 장르와 쾌락의 범위를 넘어선 새로움이 필요하다. 단순한 공적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시장의 흐름에 따른 것으로, 자본의 영향력이 막강한 미국에서도 관찰할 수 있는 경향이다. 미국 영화산업은 인종, 종교, 장애 등 여러 범위에서 다양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성별도 예외는 아니다. ‘고스트 버스터즈’와 같은 인기 시리즈를 성별을 반전시켜 리부트하고, ‘아이언맨’에서 ‘캡틴마블’로 마블 스튜디오의 슈퍼히어로 영화가 큰 변화를 맞이한 것처럼 할리우드는 변화하고 있다. 한국영화의 변화가 불가피한 이유다. 조혜영 영화평론가는 이를 ‘문화를 향유할 권리’의 차원에서 고려해야 할 기회라고 봤다. 그는 “적어도 보는 사람들이 ‘내가 나를 대표하는, 나의 경험과 감정을 투사할 수 있는 작품을 볼 권리’를 마련하는 일”이라며 “이제는 과연 작품성이란 무엇인가, 서사의 인과성은 누가 어떻게 결정하는가 등 근본적인 것들에 대해 계속해서 질문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이제껏 여성들이 촬영 현장에서, 각본을 쓰면서, 제작이 무산될 때마다,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져온 질문이기도 하다. “저 스스로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무엇인지' 특정해야 하는 것 자체가 어렵고 불가능한 부분도 있어요. 다만 저는 작품에서 '나 자신'을 소외시키지 않고, 나의 기준을 잃지 않고, 나의 감각-내가 좋다고 느끼는 것, 싫다고 느끼는 것, 인상 깊었던 것, 두려운 것 등등-을 잘 담아내야지, 마음먹습니다. ‘벌새’ 김보라 감독님이 ‘여성이 이미 소수자이기 때문에 여성 감독은 사회에 꼭 필요한 의미있는 시선을 작품에 담아낼 수밖에 없다’라고 하셨던 게 기억이 나요.” 유은정 감독은 창작자로서 가진 정체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렇게 여성들은 버텨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영화를 만들고 있다.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