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시트’, ‘지금 여기’의 오락영화

임현경 ize 기자 2019.08.1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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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시트’, ‘지금 여기’의 오락영화


* 영화 ‘엑시트’의 내용이 있습니다.


‘엑시트’에는 관객들이 쉽게 공감할만한 한국사회의 현실들이 있다. 직장을 구하지 못해 가족들의 눈치를 받는 용남(조정석)과 다니는 직장에서 점장의 추근거림을 감내해야 하는 의주(임윤아)는 요즘 청년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연회장에서 용남 가족이 여는 가족 잔치의 풍경, 잔치를 여는 사이 도시에 유독가스가 풀리자 사설드론업체에 돈을 주고 산 영상을 제보라고 속여 특종을 만들어내는 보도국장(배해선), 같은 해병대 출신이라는 말에 태도를 바꾸는 남성들 등 한국 어딘가에 나타날 법한 주변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이쯤 되면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땅에서 위쪽으로 올라오는 유독 가스가 한국 사회에 대한 은유 아닌가 싶을 정도다. ‘엑시트’에서 도무지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청년들은 살길을 찾기 위해 ‘상위’를 향해 질주해야 한다.

그러나 ‘엑시트’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끊임없이 보여주되 그에 대한 입장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보도국장의 행동에 대한 도덕적인 판단을 하거나, 대기업과의 특허 분쟁에서 진 뒤 유독가스를 푼 테러범을 비판하거나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엑시트’는 그들로 인해 의주와 용남이 겪게 되는 상황에만 집중한다. 테러로 인해 시민들이 겪는 구체적인 문제나 가족을 잃은 시민들의 슬픔도 부각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두 주인공에 대한 설정마저도 자세한 설명은 없다. 용남의 가족 환경은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을 것 같은 상황 묘사를 제외하면 ‘넉넉하지는 않지만 화목한’ 딱 그 정도의 가정이고, 용남또한 대학 시절 산악 동아리를 했다는 것 외에 별다른 과거가 없다. 같은 대학을 다닌 의주는 아예 직장에 다닌다는 것 외에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는다. 두 사람은 마치 ‘아무개’처럼 기표로서 기능한다. 위기에 빠진 평범한 시민, 좋은 직장을 원하는 청년 등등. ‘엑시트’는 사건의 배경과 그에 대한 반응을 최대한 제거하고, 주인공을 눈앞에 보이는 현상 안에서 쉴 새 없이 달리도록 만든다.



‘엑시트’는 마치 요즘의 게임을 연상시킨다. 두 사람은 닫힌 옥상문을 열어야 하고, 수집한 물건들을 조합해 새로운 방어구를 만들어야 하며, 새 방독면이 유독가스에 버틸 수 있는 시간은 10~15분으로 정해져 있다. 드론이 따라붙어 그들의 과정을 중계하는 시점부터, 두 사람이 건물과 건물을 오가는 모습은 어느 게임의 화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두 사람은 유독가스를 피해 안전지대로 탈출하는 ‘미션’을 가진 플레이어이며, ‘엑시트’는 영화 내내 가까운 목표를 제시하고 단계별로 국면을 전환하며 관객의 흥미를 붙잡아 놓는다. 두 플레이어의 생존을 위한 아이템도 있다. 지하철 역사에는 방독면이 비치돼있고, 쓰레기봉투를 이용해 방진복을 만들어 입을 수 있으며, 벗기 전에는 바람을 이용해 오염물질을 제거해야 한다. ‘SOS’는 모스부호로 ‘따따따 따-따-따 따따따’라는 것 등 영화 속 설정은 실제 상황에서 얼마든지 실천 가능한 안전 지침이다. 그리고 ‘용감한 남자’ 김용남과 ‘정의로운 주인공’ 정의주는 모두를 위한 생존의 기본 특성이 용기와 정의임을 알게 한다. 용남은 위험을 무릅쓰고 나선 끝에 연회장 옥상문을 열고선 등반 능력이 없는 가족과 시민들을 첫 번째 헬기에 먼저 태워 보낸다. 의주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울먹이면서도 보습학원 건물에 갇힌 학생들에게 간신히 잡은 두 번째 헬기를 양보한다. 평범하며 단순한 설정을 가진 주인공은 그렇기 때문에 관객이 별다른 편견 없이 영화가 제시하는 시민의식을 받아들이게 만든다.

학생들을 구하기 전, 의주는 영화 초반에도 직장에서 재난 상황을 확인하자 상황을 모르는 손님들부터 대피시킨다. 두 장면은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 만든다. 의주를 보며 그 때 한발 먼저 어른들이 나설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엑시트’가 의주의 행동으로 강조하는 건 개인의 영웅적인 선택이 아니다. 대신 의주처럼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각자의 다양한 방식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마침내 두 사람이 세 번째 헬기에 몸을 싣게 되는 데에는 돈과 인맥을 총동원해서 드론업자에게 부탁했던 아버지, 문제를 제기하는 언론, 응원하는 시민들, 공사장에 설치된 추락방지망 등 배경으로 주어졌던 모든 조건이 조금씩 보탬이 된다. 삶을 위해서는 가족부터 사회적 ‘안전망’에 이르기까지 모든 구성 요인의 공존과 화합이 필요하다는 것을, 굳이 설명하지 않고도, 모두가 가진 작은 숭고함을 통해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드론이 두 주인공을 보듯 유독가스로 인해 일어나는 현상에 집중하는 ‘엑시트’의 시선은 이 지점에서 빛난다. 관객은 드론을 조종하듯 두 사람을 중심으로 사건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다. 하지만 ‘엑시트’는 현상에 대한 해석을 최대한 배제하면서 재난 상황을 극복하는데 필요한 요소들을 건조하게 제시한다. 관객은 스스로 느끼는 바를 영화의 의도에 따른 것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으로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관객은 직관적인 사고과정에 따라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소방인력과 구조헬기가 늘어난다면, 비상용 완강기가 튼튼해진다면, 유독가스를 흩트리고 로프를 잡아줄 도움의 손길이 많아진다면, 위기가 더 쉽게 해결될 것이라는 판단에 이르게 된다. 개인의 용기와 정의를 구심점으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시민들의 연대, 더 나아가 사회 인프라 확충과 시민의식 개선에 대한 필요성까지 자연스럽게 설득한다.

그 결과 영화에서만이라도 과거의 인재(人災)는 반복되지 않는다. 용남과 의주는 재난 상황에서 대처하는 방법을 이미 학습한 상태이고. 정부는 악조건 속에서 최대한 빠르게 유독가스의 성분을 파악하고 대피 요령을 공지하며, 언론은 취재 없이 보도 지침을 따랐던 과거와 달리 현장 상황을 생중계한다. 영화는 사회가 가진 과거의 트라우마를 상기시키고 앞으로의 비극을 막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반추한다. ‘엑시트’는 상황에 대한 감정과 판단을 보는 사람의 몫으로 비워둠으로써 이념이나 가치관에 따른 거부감과 소외감을 줄였고, 계단처럼 쌓은 서사는 게임과 유사한 오락성과 메시지의 필연성을 모두 잡았다. 정치적 성격을 최소로 줄인 영화는 모순적으로 최대한 정치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엑시트’만큼 안전에 대한 시민과 국가의 책임에 대해 자연스럽게 설득하는 작품은 드물다. 흔히 ‘K-무비’라고도 불리던 한국영화의 어떤 요소들을 재료 삼아 오히려 지금의 한국을 재구성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K-무비’의 등장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지금 한국 관객들이 생각하는 공공선, 또는 ‘보편타당'한 가치가 무엇이고 어디까지인지 제시한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엑시트’ 속 한국사회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상하좌우 관계없이 누구나 당연하게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 최소한의 현실이다. 다만, 과연 여기까지가 한계인가라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과연 한국 영화는, 더 나아가 한국 사회의 ‘보편타당’은 그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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