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시트’에는 관객들이 쉽게 공감할만한 한국사회의 현실들이 있다. 직장을 구하지 못해 가족들의 눈치를 받는 용남(조정석)과 다니는 직장에서 점장의 추근거림을 감내해야 하는 의주(임윤아)는 요즘 청년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연회장에서 용남 가족이 여는 가족 잔치의 풍경, 잔치를 여는 사이 도시에 유독가스가 풀리자 사설드론업체에 돈을 주고 산 영상을 제보라고 속여 특종을 만들어내는 보도국장(배해선), 같은 해병대 출신이라는 말에 태도를 바꾸는 남성들 등 한국 어딘가에 나타날 법한 주변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이쯤 되면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땅에서 위쪽으로 올라오는 유독 가스가 한국 사회에 대한 은유 아닌가 싶을 정도다. ‘엑시트’에서 도무지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청년들은 살길을 찾기 위해 ‘상위’를 향해 질주해야 한다.
그러나 ‘엑시트’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끊임없이 보여주되 그에 대한 입장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보도국장의 행동에 대한 도덕적인 판단을 하거나, 대기업과의 특허 분쟁에서 진 뒤 유독가스를 푼 테러범을 비판하거나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엑시트’는 그들로 인해 의주와 용남이 겪게 되는 상황에만 집중한다. 테러로 인해 시민들이 겪는 구체적인 문제나 가족을 잃은 시민들의 슬픔도 부각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두 주인공에 대한 설정마저도 자세한 설명은 없다. 용남의 가족 환경은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을 것 같은 상황 묘사를 제외하면 ‘넉넉하지는 않지만 화목한’ 딱 그 정도의 가정이고, 용남또한 대학 시절 산악 동아리를 했다는 것 외에 별다른 과거가 없다. 같은 대학을 다닌 의주는 아예 직장에 다닌다는 것 외에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는다. 두 사람은 마치 ‘아무개’처럼 기표로서 기능한다. 위기에 빠진 평범한 시민, 좋은 직장을 원하는 청년 등등. ‘엑시트’는 사건의 배경과 그에 대한 반응을 최대한 제거하고, 주인공을 눈앞에 보이는 현상 안에서 쉴 새 없이 달리도록 만든다.
학생들을 구하기 전, 의주는 영화 초반에도 직장에서 재난 상황을 확인하자 상황을 모르는 손님들부터 대피시킨다. 두 장면은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 만든다. 의주를 보며 그 때 한발 먼저 어른들이 나설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엑시트’가 의주의 행동으로 강조하는 건 개인의 영웅적인 선택이 아니다. 대신 의주처럼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각자의 다양한 방식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마침내 두 사람이 세 번째 헬기에 몸을 싣게 되는 데에는 돈과 인맥을 총동원해서 드론업자에게 부탁했던 아버지, 문제를 제기하는 언론, 응원하는 시민들, 공사장에 설치된 추락방지망 등 배경으로 주어졌던 모든 조건이 조금씩 보탬이 된다. 삶을 위해서는 가족부터 사회적 ‘안전망’에 이르기까지 모든 구성 요인의 공존과 화합이 필요하다는 것을, 굳이 설명하지 않고도, 모두가 가진 작은 숭고함을 통해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그 결과 영화에서만이라도 과거의 인재(人災)는 반복되지 않는다. 용남과 의주는 재난 상황에서 대처하는 방법을 이미 학습한 상태이고. 정부는 악조건 속에서 최대한 빠르게 유독가스의 성분을 파악하고 대피 요령을 공지하며, 언론은 취재 없이 보도 지침을 따랐던 과거와 달리 현장 상황을 생중계한다. 영화는 사회가 가진 과거의 트라우마를 상기시키고 앞으로의 비극을 막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반추한다. ‘엑시트’는 상황에 대한 감정과 판단을 보는 사람의 몫으로 비워둠으로써 이념이나 가치관에 따른 거부감과 소외감을 줄였고, 계단처럼 쌓은 서사는 게임과 유사한 오락성과 메시지의 필연성을 모두 잡았다. 정치적 성격을 최소로 줄인 영화는 모순적으로 최대한 정치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엑시트’만큼 안전에 대한 시민과 국가의 책임에 대해 자연스럽게 설득하는 작품은 드물다. 흔히 ‘K-무비’라고도 불리던 한국영화의 어떤 요소들을 재료 삼아 오히려 지금의 한국을 재구성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K-무비’의 등장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지금 한국 관객들이 생각하는 공공선, 또는 ‘보편타당'한 가치가 무엇이고 어디까지인지 제시한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엑시트’ 속 한국사회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상하좌우 관계없이 누구나 당연하게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 최소한의 현실이다. 다만, 과연 여기까지가 한계인가라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과연 한국 영화는, 더 나아가 한국 사회의 ‘보편타당’은 그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