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교통, 식당, 주거용 건물 등…. 우리나라 곳곳에서 '영어'가 넘쳐흐르고 있다. 번화가를 지나다 보면 영어로만 쓰여진 간판이 수십개. 안내문, 제품 포장 등에도 영어 단어를 한글로 그대로 옮겨 쓰거나 아예 영문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대체할 한국어가 있음에도 생활 속에서 영어를 남용하는 사례가 늘며 이에 씁쓸함을 느끼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아파트 단지의 영어 사용 남발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 영어 등 외국어가 주는 어감이나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이용, 분양성을 높이기 위해 무분별하게 외국어를 차용하는 일이 많아져서다.
부산의 한 아파트 관리사무소. 한글이 아닌 영어 'MANAGEMENT OFFICE'로 표기돼 있다./사진=온라인 커뮤니티
최근에는 영어와 독일어, 프랑스어 등을 합성한 신종 외국어까지 등장했다. 지난해 삼성물산이 서울 양천구 신정동에 분양한 '래미안 목동 아델리체'의 경우 무려 3개 국어가 혼용됐다. '아델리체'(Adeliche)는 '고귀한'이란 의미의 스페인어 아델리오(Adelio)와 '귀족', '품격'을 나타내는 독일어 아델(Adel), 그리고 '소중히 하다'는 뜻을 가진 영어 체리쉬(Cherish)를 결합한 단어다. '래미안 삼성동 라클래시'도 프랑스어 라(La)와 영어 클래시(Classy·세련된)의 조합이다.
직장인 이선영씨(33)는 "아파트 주차장도 출입구에 'IN/OUT'이라고만 쓰여 있다. 영어에 대한 집착이 너무 심한 것 같다"며 "한글로 깔끔하게 적어놔도 충분히 고급스럽고 예쁠 텐데…. 누구든 알아보고 이해할 수 있게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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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가 점령한 곳은 아파트 뿐만이 아니다. 최근 도입된 서울 신형버스 일부에는 영문 'STOP'으로만 표기된 하차벨이 부착됐다. 기존 버스 하차벨에는 버튼 밑에 한글로 '하차벨'이라고 표시돼 있으며, 손가락 그림이 버튼을 가리키는 스티커도 부착돼 있다. 햄버거 전문점 자동주문기에는 언어를 선택하라는 안내글이 'Please selcet your language'라고 영어로 표시된다.
일부 신형 버스에 부착된 하차벨(사진 왼쪽). 기존 하차벨(오른쪽)과 달리 영문으로만 표기돼 있다./사진=박가영 기자, 온라인 커뮤니티
누리꾼 aous****는 "대형 마트 같은 데도 계산대에 'Cashier'라고만 써붙여 놓더라. 한국인데 한글 없는 데가 너무 많다. '국제화 흐름이다' '영어가 고급스럽다'며 영어를 남용하는 곳이 많은데, 오히려 촌스럽게 느껴진다"고 꼬집었다.
자영업자 박모씨(57)는 "식당 가면 음식 이름도 영어로만 써 있다. 그것도 작게"라며 "영어로 표기돼 있으면 예뻐보이긴 한다. 그런데 도통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매번 자녀들에게 물어보기도 영 쑥스럽다"고 털어놨다.
주부 김모씨(54)는 "지금이라도 영어를 공부해야겠단 생각이 든다. 영어가 많아지니 이게 시대 흐름인가 싶다. 시대가 나에게 맞춰 흘러가지 않으니 내가 시대에 맞춰 살아가야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국립국어원 관계자는 "최근 생활 속에서 한글 병기 없이 영어 등 외국어로만 표기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외국어를 모르는 이들이 이해하지 못해 소외감을 느낄 뿐 아니라 잘못 이해해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며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한글을 우선적으로 쓰고, 외국어를 사용해야 한다면 우리 말을 함께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