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희의 중심

서지연(칼럼니스트) ize 기자 2019.07.24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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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희의 중심


tvN ‘60일, 지정생존자’에서 지진희가 연기하는 박무진은 국회의사당이 폭파되는 초유의 사태로 하루아침에 국가 최고 권력자가 된다. 드라마 초반, 정치경력 6개월의 그는 장관보다는 교수, 청와대보다는 학교에 더 어울리는 남자로 묘사된다. 책상 아래서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딱딱한 구두코를 남몰래 비비고, 목을 조르는 넥타이에 답답해하는 박무진은 숙맥처럼 보일 정도다. 이러한 박무진이 권력을 경험하며 자신의 역할과 힘을 깨닫고 변화하는 과정은 그래서 흥미롭다. ‘권력은 자신과 관계없는 말’이라고 일축했던 그는 테러 용의자를 잡기 위해 파병된 군인이 희생되자 청와대를 떠난 비서실장 한주승(허준호)을 찾아가 괴로워하면서도 자신이 이 자리를 감당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간절히 매달린다. 그리고 지진희의 다부진 몸과 차분한 발성, 섬세한 감정표현은 한없이 흔들리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는 박무진을 완벽하게 설득시킨다.

믿고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바위 같은 사람과 감정의 파도에 속절없이 흔들리는 사람. 지진희는 드물게도 이 상반된 얼굴들을 다 가진 배우다. 배우로서 그가 처음으로 주목받았던 것은 2003년 MBC 드라마 ‘대장금’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장금(이영애)을 지켰던 민정호 역할을 맡으면서부터다. 하지만 지진희는 ‘우직한 남자 주인공’에만 머물지 않았다. 엄청나게 흥행한 ‘대장금’ 이후 SBS ‘파란만장 미스김 10억 만들기’에서 허세 가득한 백수 박무열을 연기하며 뜻밖의 모습을 보여 주는가 싶더니 다시 정통 멜로에 가까운 SBS ‘봄날’의 고은호로, MBC ‘스포트라이트’의 카리스마 기자 오태석으로 변신을 거듭했다. 반듯한 모범생처럼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사실 지진희의 필모그래피는 모험적이라고 할 만큼 다양한 캐릭터들로 가득 차 있다. KBS ‘결혼 못하는 남자’의 괴팍한 독신남 조재희를 연기하는가 하면, MBC ‘동이’에서는 어쩐지 발랄한 임금 숙종으로 다시 한 번 자신만의 사극 연기를 보여줬다. 특히 SBS ‘따뜻한 말 한마디’와 ‘애인 있어요’에서 도덕적이지는 않지만 절절한 사랑을 연기했던 시간들은 그를 떨리는 눈빛과 호흡만으로도 수많은 감정을 표현해내는 배우로 만들었다. 그리고 2년간의 공백 후 2018년 JTBC ‘미스티’로 복귀했을 때 지진희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강태욱을 성공적으로 연기해냈다. 복잡한 감정에 휘둘리다 결국 자신을 파괴하고 마는 인간. 그가 배우로서 차곡차곡 쌓아온 다양한 인생들이 없었다면, 결코 완성할 수 없었던 역할이다.

지금 ‘60일, 지정생존자’의 박무진은 지진희가 배우로서 무엇을 가장 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박무진은 두려움에 변기를 붙잡고 토악질을 할 만큼 연약하지만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과감하게 권력을 휘두르는,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인물이다. 사실 역할을 떠나 연기의 승패는 한 사람의 다층적인 내면을 얼마나 이해하고 표현하느냐에 달려있기도 하다. 극단적인 상황에서 최선을 선택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며 성장하는 박무진은 작품 속에서 거듭 새로워진다. 그리고 보는 이들에게 변화 너머의 성장을 설득하는 것은 어느새 20년이 넘는 시간을 배우로 살아온 지진희다. “나는 누구처럼 한방에 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겠더라. 그래서 절대 뒷걸음치지 말자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래 왔다. 뒷걸음치지 않았다”(‘아레나 옴므 플러스’)라고 자신할 만큼, 강직한 마음을 품고 있는. 이 심지 곧은 배우는 마침내 증명하는 중이다. 내가 흔들리지 않고 여기 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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