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전경 /사진=위키커먼스
그는 그러면서 "강성 귀족노조로 인해 울산경제도 어려워지고 나라도 어려워진다"며 "이제는 모두가 한 발짝씩 물러서 울산시민들의 행복과 재도약을 위해 마음을 모아야 할 때"라고 말했다.
2019년 현재 미국을 대표하는 도시로 뉴욕, 샌프란시스코, 보스턴, 워싱턴DC, 로스앤젤레스 등이 꼽힌다면, 1900년대 미국엔 디트로이트가 있었다. 미국 동북부에 위치한 미시간 주의 최대 도시, 디트로이트는 당시 미국을 대표하는 가장 큰 도시였다.
더군다나 디트로이트는 강을 다리 하나 사이에 두고 캐나다 온타리오 윈저시와 마주하고 있어, 넓은 시장 확보에도 유리했다. 여기에 놓인 다리(앰버서더 브릿지)는 지금까지도 이동량이 많아 북미에서 가장 바쁜 다리로 꼽힌다. 이 같은 입지 덕에 디트로이트에 물류와 사람이 몰리며 가파르게 도시가 성장했다. 1830~1860년 30년간 인구는 6배로 증가했다.
2014년 디트로이트시 전경 /사진=AFP
포드 뿐만 아니라 크라이슬러, GM(제너럴모터스) 등도 이곳에서 공장을 운영했다. 이 세 브랜드는 서로 경쟁하며 미국 자동차 산업 전성기를 이끌었다. 1920년대 초에는 포드가 연간 생산대수 170여만대로 미국 자동차의 절반을 생산하며 호황을 이끌었고, 1920년대 말에는 GM이, 1930년대에는 크라이슬러가 호황을 주도해 나갔다. 이 세 브랜드는 디트로이트에서 10개가 넘는 대형공장을 운영하며 공장 직원 30여만명을 고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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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회사와 공장에서 일하고자 하는 이들이 전국에서 모여들면서, 디트로이트의 인구는 지속적으로 늘었다. 디트로이트 시가 걷는 세수가 늘어났고, 도시는 지속적으로 발전해갔다. 높은 빌딩이 지어졌고 다리가 세워졌으며 극장, 쇼핑몰, 호텔 등도 속속들이 들어섰다.
디트로이트의 호황은 이렇게 지속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디트로이트는 1950년 185만명으로 인구 정점을 찍은 이후 꾸준히 인구 유출 현상을 겪는 도시가 됐다. 이후 디트로이트는 '망한 도시' '파산 도시' '유령 도시'라는 별명을 얻었다. 디트로이트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사실 단순히 생각했을 때 미국의 자동차 산업이 위기를 맞고, 또 이곳이 도시 쇠퇴를 겪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제조업 경쟁력이 미국에서 개발도상국으로 옮겨가면서 경쟁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보다 저렴한 값에 꽤나 괜찮은 기술력을 가진 일본 자동차가 등장하며 미국 자동차는 큰 타격을 받았다.
여기에 높아진 디트로이트 자동차 3사의 직원 연금 및 의료비나 생산직 근로자의 임금 등도 부담의 원인으로 꼽혔다. UAW(전미자동차노조)의 요구를 들어준 결과, 미국 내 일본 완성차 업체 등과 비교했을 때 디트로이트 자동차 3사의 노동자 임금이 높아 생산성이 낮다는 지적이 나왔다. 다양한 이유로 미국 자동차 산업이 위축됐고, 보다 인건비가 저렴한 제3세계나 미국 남부로 공장이 이전하면서 디트로이트는 몰락의 길에 들어섰다.
2014년 디트로이트시 전경 /사진=AFP
이전까지 가족당 평균소득 수준은 디트로이트가 피츠버그에 비해 높았지만, 1980년대를 전후로 역전됐고, 이젠 피츠버그와 디트로이트는 비교 불가한 도시가 됐다. '죽은 도시'가 된 디트로이트와 달리, 피츠버그는 1990년 모기지 사태 때도 타격을 받지 않은 도시였고, 2010년대에는 포브스, 이코노미스트 등에 의해 '미국에서 제일 살기 좋은 도시'로 꼽혔다.
조형제 울산대 사회학 교수는 논문 '산업도시의 재구조화와 거버넌스'를 통해 두 도시의 발전 양상 차이에는 '인종 구성'이란 변인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피츠버그는 인종 구성상 흑인 비율이 전체의 27.1%에 불과한 반면, 디트로이트는 흑인 비율이 전체의 81.6%를 차지하고 있다. 피츠버그는 백인 비율이 높아 도시 내 백인들간의 동질성을 유지해 교외로의 이주를 억제하고 도시재구조화를 위해 행위 주체들이 서로 협조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지만, 디트로이트는 흑인 비율이 높아 그렇지 못했다는 설명이다.
조 교수의 설명처럼, 사실 인종 비율 그 자체가 문제라기 보다는 이런 인구 구성이 나타나게 된 데에 큰 문제가 있다. 디트로이트가 발전하던 1900년대 중반까지 많은 노동자들이 디트로이트 도시 중심으로 유입됐는데, 이 과정에서 인종 갈등이 축적됐다.
1940년대 초 자동차 생산이 절정을 이뤘을 때, 채 3년이 되지 않는 기간 동안 30만명이 넘는 백인 노동자와 5만명의 흑인 노동자가 디트로이트에 유입됐다. 하지만 대부분의 흑인 가정은 주거지를 얻기 어려웠다. 백인 거주자들은 흑인들을 지역과 사회에 위협이 된다고 봤다.
흑인 가정은 백인 가정 보다 더 높은 임대료를 내야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살 수 없었다. 자동차 공장에서도 '2등 시민' 대우가 이어졌다. 1943년 패커드 모터스(Packard Motors)가 백인들과 같은 생산라인에서 일할 수 있도록 흑인 노동자 3명을 승진시켰을 때 2만5000명에 달하는 백인 노동자가 항의 시위를 했듯이 말이다.
한번에 많은 사람들이 디트로이트로 몰려들면서 한정된 일자리와 한정된 주택을 두고 백인과 흑인간의 갈등이 커져갔다. "조선소에서 일하는 백인 노동자가 흑인들에게 공격을 당했다"는 텍사스발 루머가 디트로이트에 도달하면서, 1943년 6월 '디트로이트 인종 폭동'이 일어났다. 두 인종이 맞붙으면서 34명 사망(25명 백인·9명 흑인), 433명 부상, 200만 달러(2015년 기준 2750만 달러·약 323억원) 상당의 재산이 파괴됐다.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현실은 디트로이트 자동차 산업이 몰락하고 실직이 이어지던 1950년대를 기점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에 백인들은 더욱 더 도시 외곽으로 거주지를 옮겨갔다. 의사, 변호사 등 상류층 백인들은 도시 중심부에 거주하는 흑인 노동자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이제 잘 사는 백인들은 도시 외곽에, 못 사는 흑인들은 도시 중심부에 살게 됐다. 인종이 완전히 갈린 것이다.
1967년 미국 17개 도시에서 잇달아 일어난 흑인 폭동 사태 일환으로 모든 게 마비된 디트로이트를 배경으로 어느 밤, 알제 모텔에서 울려 퍼진 세발의 총성 뒤에 가려진 시간을 추적하는 작품. 영화 디트로이트 스틸컷
디트로이트 폭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뉴욕,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휴스턴 등 전국 17개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이에 존슨 미국 당시 대통령은 상황이 가장 최악인 디트로이트에 4100명 규모의 공수부대와 정규군을 급파했다. 병력이 투입된 디트로이트는 5일만에 안정을 되찾았지만, 디트로이트는 사망 36명, 부상자 2000여명이라는 큰 타격을 입었다.
인종별로 나뉘어 살고, 꾸준히 폭동이 일어나는 등 인종적 긴장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디트로이트 교외에 자리 잡았던 다수의 백인들은 디트로이트를 대거 빠져나갔다.
이렇게 디트로이트는 1950~1970년 사이에만 32만5000여명의 주민을 잃었다. 인구가 줄었다는 건 과세 기반이 줄어들었다는 뜻이다. 더군다나 빠져나간 인구의 대다수가 구매력 있는 백인이라는 것도 문제였다. 도시의 기반 시설 지원은 점차 어려워졌고, 빈 건물이 늘어갔다. 점차 도시 전체가 할렘화돼가면서 범죄가 증가했다.
디트로이트 유명 건물인 르네상스 센터. 포드가 건설한 르네상스 센터는 현재 라이벌 회사인 GM자동차가 본부로 사용 중이다. /사진=AFP
'디트로이트 르네상스'는 탈산업화 추세에 대응해 도시 경제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도심 지역 서비스 부문의 활성화를 도모했다. 은행, 유틸리티, 부동산 개발 등 서비스 부문을 활성화하기 위해 르네상스 센터를 비롯해 호텔, 컨벤션 센터, 스타디움 등의 건설이 추진됐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인구는 유출됐고, 도시는 황폐화되기만 했다.
여기에 디트로이트시가 자동차 산업을 도시 내부에 붙잡아두려고 했던 노력도 부작용만 낳았다. 시정부는 1980년에는 GM 공장 부지를 재정비해 좀 더 기술적으로 고도화한 공장을 세우는 '폴타운 프로젝트'를, 1986년에는 크라이슬러 공장을 재정비하는 '제퍼슨공장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이 과정 시정부는 세금 감면과 연방정부의 보조금 지원 등의 특혜를 제공했는데, 이는 자동차 업체의 고용을 일정 규모로 유지하는 효과를 가져오긴 했지만 정작 주민 복지나 주민 생활 향상 등 여타 꼭 필요한 곳에 지원할 돈이 사라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2013년 인구는 70만명으로 줄어들었고, 같은 해 '포브스' 선정 '미국에서 가장 비참한 도시 1위'로 선정됐다. 하지만 불명예는 끝이 아니었다. 시는 미 지방자치단체 역사상 최초로 파산을 신청했다. 불어나는 연금지급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185억 달러(약 21조원)의 부채를 상환하지 못한 까닭이다. 당시 디트로이트는 시내 가로등을 켜지 못할 정도로 재정난에 빠졌다.
영화 8마일 스틸컷
수십년간 절망에 빠져있었고, 또 도시 파산을 맞으며 영구한 죽음을 맞은 것 같았던 디트로이트는, 어쩐지 최근 '핫한' 도시로 부응하는 모양새다. 다음 편에서는 죽은 도시 디트로이트가 어떻게 살아날 수 있었는지 짚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