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투데이

이다희, 새로운 판타지

김리은 ize 기자 2019.07.17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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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사이를 뛰어넘으며 추격전을 펼치고, 유도 실력으로 범죄자를 순식간에 제압한다. 장면들만 나열하면 누아르나 수퍼히어로물의 주인공 같다. 그러나 tvN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이하 ‘검블유’)에서 이다희가 연기하는 차현의 직장은 유명 포털 사이트 회사다. 남성인 성범죄자에게 전치 12주의 부상을 입히고, 그로 인해 전과 기록이 있음에도 직장에서 일할 만큼 유능함을 인정받는 차현의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다만 그가 보여주는 판타지가 완성되는 지점은 그가 가진 힘의 크기가 아니라 힘이 쓰이는 방향이다. 무명배우 설지환(이재욱)이 겪는 설움을 살피거나, 사이가 좋지 않은 배타미(임수정)가 겪는 부조리에 함께 맞서는 것처럼 차현의 힘은 일관되게 정의를 향한다. 이런 차현의 존재를 설득하는 것은 상당 부분 이다희의 힘이다. 175cm의 큰 키와 서구적인 얼굴이 차현의 강단을 표현한다면, 극중에서 “너 눈 커서 다 티나”라는 대사로 표현되는 크고 투명한 눈동자는 마치 정의를 판별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상황에 다양한 감정으로 반응한다. 이해관계와 욕망이 시시각각으로 충돌하는 직장의 세계에서, 강한 신체적 능력과 정의실현의 욕구를 가진 여성이 존재하는 판타지는 그렇게 완성된다.

아이러니하게도, 2002년 슈퍼모델 선발대회로 데뷔한 이다희에게 큰 키는 오랫동안 걸림돌이었다. SBS ‘청담동 앨리스’에 출연하고 싶었지만 키가 너무 크다는 이유로 미팅 기회조차 잡지 못했고, “남자배우와의 밸런스”(‘헤럴드POP)를 이유로 작품이 무산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남성과의 “밸런스”를 맞추는 대신 여러 역할을 거치면서 자신만의 “밸런스”를 만들어왔다. SBS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서도연이나 KBS ‘비밀’의 신세연처럼 냉철하거나 스스로의 욕망에 충실한 인물들을 연기하면서도, 첫 주연이었던 KBS ‘빅맨’의 소미라를 통해 근본적으로 선한 인물도 연기할 수 있음을 증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정한 인기”(‘코스모폴리탄’)는 JTBC ‘뷰티 인사이드’의 항공사 재벌 강사라를 연기하면서 시작됐다. 주로 상대방을 압도하는 역할에 적합해 보였던 큰 키와 도회적인 얼굴은 성별의 위계를 전복시키는 통쾌함을 주기에 충분했고, 다양한 감정을 소화하는 섬세한 표정 연기는 날카롭고 경쟁적인 모습 뒤에 선한 마음을 가진 강사라의 매력을 설득했다. 그렇게 그는 여성들이 꿈꾸는 전복된 판타지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연기자가 됐다. 원래부터 그가 잘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미디어에 다양한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좀처럼 보여주기 어려운 모습이기도 했다.

좋아하는 남성을 만나기 위해 그가 일하는 카페를 통째로 대여하거나 백화점의 가방을 모조리 구입하던 강사라와 달리, 차현은 조금 더 보편적인 일상에 가까운 인물이다. 직장에서 회식보다 ‘혼밥’을 선호하며, 베레모나 프릴이 달린 의상으로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고, 집에서는 소파에 누워 막장 드라마를 즐겨보는 것처럼 스스로의 취향에 충실한 그의 모습은 여느 30대 여성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처럼 보편적인 일상을 사는 여성이 성폭력에 직접 맞설 수 있는 육체적인 힘을 갖추고, 박한 현실 속에서도 정의에 대한 신념을 잃지 않는 것 역시 2019년에는 재벌의 삶만큼이나 강력한 판타지이기도 하다. 시대는 바뀌고 대중이 원하는 판타지도 바뀐다. 그 사이 누군가는 과거를 탓하는 대신 “결국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 없이 내가 열심히 해야 했던 것”(‘에스콰이어’)이라 말하고, 과거에 누군가 단점이라 했던 것들조차 오늘의 장점으로 활용하며 자신의 영역을 넓힌다. 데뷔 18년차, 이다희는 그렇게 새로운 판타지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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