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사진=뉴스1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하지만 현실의 '슈퍼파워'들이 꼭 힘에 걸맞는 책임을 다 하는 건 아니다. 지금의 초강대국 미국이 그렇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미국은 더 이상 세계의 경찰 역할을 계속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런 미국을 무작정 탓할 수만은 없다. 반세기 넘게 세계의 해결사 노릇을 하느라 미국은 빚더미에 올랐다. 지금까진 자국의 에너지 수급을 위해 중동 평화를 책임졌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 '셰일혁명' 덕분에 미국은 이제 세계 최대 석유 생산국이 됐고, 곧 석유 순수출국으로 돌아선다.
'미국 우선주의' 깃발 아래 미국은 다른 국제분쟁에 무관심해졌다. 경찰이 없는 무정부상태가 시작되면 동네 불량배들의 해방구가 열린다. 오로지 힘이 지배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다. 유엔이 있지만 이 역시 국제 역관계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일본 같은 자칭 '골목대장'들이 발호하는 배경이다.
일본의 수출규제와 같은 한일 갈등이 불거졌을 때 예전 같으면 미국이 팔을 걷어붙이고 해결에 나섰겠지만, '고립주의' 노선의 트럼프 행정부는 다를 수 있다. 미 국무부는 "한일 관계 강화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겠다"고 했지만 외교적 수사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다.
미국은 중재를 위해 한미일 3자 고위급 협의를 원하는데 일본이 응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동안의 미일 관계에 비춰볼 때 미국의 의지가 정말 강하다면 일본이 과연 거부할 수 있을까? 중국의 인도·태평양 진출을 견제하는 한미일 3각 공조가 와해될 때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건 미국이다. 그럼에도 만약 한일 갈등을 강 건너 불 보듯 한다면 미국이 실수하는 거다.
문제는 설령 트럼프 대통령이 한일 갈등에 관심을 갖고 개입하더라도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일지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한국 반도체 생산에 문제가 생기면 마이크론 등 미국 반도체 회사들이 수혜를 본다며 오히려 반길지도 모른다. 게다가 미국은 필리핀 등을 식민지배했던 국가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대한 책임 문제를 놓고 일본과 한국 가운데 어느 쪽에 더 동질감을 느낄까?
미국 언론의 보도 역시 일본 입장에 편향돼 있다. 미국 지상파 ABC와 미 관영언론 '미국의소리'(VOA)는 한국이 국가간 약속을 깼기 때문에 수출 문제도 신뢰할 수 없다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논리를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학계도 마찬가지다. 일본이 미국 정치학계에 뿌린 천문학적 지원금을 받아쓴 이른바 '재팬스쿨' 학자들이 누구 편을 들어줄까?
해법은 미국 기업들을 움직이는 것 뿐이다. 한국산 부품 조달이 막혀 생산에 차질이 생기니 일본의 수출규제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미국 IT(정보기술) 기업들의 호소를 끌어내야 한다.
자국 기업들의 아우성은 사업가 출신 트럼프 대통령의 우선순위 중 하나다. 그가 멕시코에 대한 관세폭탄을 거둬들인 건 미국 기업들의 등쌀 때문이었다. 최근 110가지 중국산 제품의 관세를 면제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우리도 못할 이유가 없다. 미국에서 한국 반도체의 가치를 확인해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