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리포트-下]둘다 지더라도? '韓경제보복' 꺼낸 아베의 이유

머니투데이 김성은 기자, 강기준 기자, 백인성 (변호사)기자, 안채원 기자, 이미호 기자 2019.07.03 06:30
글자크기

[준비안된 한일 경제전쟁](종합)下

편집자주 한국 사법부의 강제 징용 배상 판결에 일본이 핵심 부품 수출규제로 맞받아치며 경제 국지전을 도발했다. 치킨게임으로 치닫는 국가간 무역전쟁의 결과는 ‘루즈-루즈(lose)’라는 게 역사적 경험이다.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일본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정부와 기업의 노력이 필수적이다. 아울러 자발적 민간대응의 역할도 상당하다는 지적이다.

日 반도체 수출 규제 '몽니'…"중국만 좋은 일"
[준비안된 한일 경제전쟁]日 경제산업성 조치 발표 당일, 일본 기업들도 사실 파악에 분주…니혼게이자이 "장기적으로 부작용이 크고 불이익 많아"



/AFPBBNews=뉴스1/AFPBBNews=뉴스1


일본이 한국을 겨냥한 '반도체 핵심 재료 수출 제한 조치'를 둔 것에 외신도 주목하면서 일본은 물론 전세계에 전자제품 공급망에 악영향을 줄 것이란 우려들이 잇따르고 있다. 특히 한국이 자체 공급망을 갖추거나 외부 공급망을 확보할 경우, 일본에는 자충수가 될 것이란 일본 내의 지적도 나온다.

지난 1일 일본 경제산업성은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리지스트, 에칭가스 등 반도체와 TV 디스플레이 핵심재료 3품목에 대한 수출규제를 4일부터 단행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그동안 미국과 한국 등 27개국을 수출 허가 취득절차 면제국인 '화이트 국가'로 지정했지만 8월부터는 한국만 제외한다는 방침도 밝혔다. 이 경우 일본 기업이 한국에 수출하고자 할 때 정부로부터 별도 허가 신청 및 심사를 받게되는데 평균 90일(약 3개월)의 시간이 소요된다.

/사진=AFP/사진=AFP
아츠시 오사나이 일본 와세다 경영대학원 교수는 1일 월스트리트저널(WSJ)과의 인터뷰에서 "일본과 한국의 제조업 분야가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이번 제재는 일본 기업들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이로부터 유일한 승자는 중국일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굴기'를 내세워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자국 전자산업을 육성하고 있는 중국이 한국이 재료 조달에 차질을 빚는 동안 관련 산업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WSJ는 "몇몇 애널리스트들은 일본이 그들 스스로 자충수를 둘 수 있다고 말한다"며 "일본 내 기업들이 사업기회를 잃을 뿐 아니라 공급망 붕괴는 한국의 반도체나 디스플레이를 사용하는 일본 완제품 업체들에도 되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실제로 일본 경제산업성의 발표가 있던 날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한국 기업들 뿐만은 아니었다.

이날 산케이신문에 따르면 규제의 대상이 된 제품을 한국 등에 수출하는 기업들은 사실 확인 등 대응에 분주했다. 에칭가스를 생산하는 스텔라 케미파와 모리타 화학공업, 리지스트 생산에 관계된 JSR과 도쿄오사카공업 등이 이에 해당했다. 스텔라케미파 측은 특히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이번 규제 조치로 자사 제품이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즉시 알렸으며 "실적에 미치는 영향은 아직 파악중"이라고 설명했다. 1일 스텔라케미파 주가는 전일 대비 2.33% 내린 2930엔에 마감했다.

도쿄오사카공업 역시 "리지스트 매출에서 한국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며 "(이번 조치의) 영향은 클 것"이라고 말해 당혹감을 나타냈다는 보도다.

전세계 반도체 가격이 상승해 소비자에게 그 피해가 전가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노무라증권의 반도체 담당 CW 정 연구원은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반도체 생산에 큰 차질이 생기면 가격 상승으로 인해 모든 피해는 고객과 소비자에 전가될 것"이라며 "미국과 중국 정부는 이것에 대해 기뻐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지난 2010년 일본이 중국과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싸고 분쟁을 벌였을 때, 중국이 희토류 수출 제한을 둬 자원 무기화 카드를 쓴 결과를 반면 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당시 분쟁 이후 일본은 호주 광산업체 라이너스를 지원해 말레이시아에 희토류 제련 공장을 설립하고, 아프리카 등 대체지나 대체 재료를 민관을 통해 개척, 개발했다. 또 이 싸움을 지켜 본 다른 나라들도 희토류 중국 의존도를 점차 낮춰나가면서 장기적으로 희토류 가격이 낮아졌다. 이번 사태로 인해 반도체 재료와 공급처로서 '탈일본화'가 가속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2일 일본 경제 매체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사설을 통해 "이번 조치는 국제정치의 도구로서 통상정책을 이용하려는 발상이 짙다"며 "하지만 기업에 미치는 영향 등 부작용이 크고 장기적으로 보면 불이익이 많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번 조치는)한국 전자산업 생산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함께 한국 기업을 주 고객으로 하는 일본 기업에도 타격을 끼칠 우려가 있다"며 "반도체를 대상으로 (통상조치를 결정) 한 것은 문제가 많다"고 덧붙였다.

김성은 기자

아베는 왜 지금 '韓경제보복' 카드 꺼냈나
[준비안된 한일 경제전쟁]표면적으론 "G20까지 韓이 징용 해결책 안내놨다"…배후엔 선거 앞두고 국내외 고립 돌파

일본이 강제징용 배상 문제를 놓고 한국에 경제보복이라는 초유의 강수를 꺼냈다. 반도체와 TV디스플레이 생산에 필수적인 소재 3품목에 대해 한국만 콕 집어 수출 규제를 강화하겠다고 지난 1일 발표한 것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왜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가 끝난지 이틀 뒤 작정한 듯 보복카드를 꺼냈을까?

2일 요미우리신문은 이번 보복조치는 이미 지난 5월 최종 결정됐다고 보도했다. 내각 내부에서는 이번 조치가 일본 기업을 비롯해 글로벌 공급망에 영향을 끼친다는 우려가 있었으나, 아베 총리와 측근이 이를 밀어부쳤다고도 설명했다. 이밖에 한국인 비자 제한 등도 검토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문제를 사전에 결정해놓고도 7월까지 발표를 미룬 것에 대해 2일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은 "강제징용 문제에 대해 G20 정상회의까지 만족하는 해결책이 나오지 않아 (한일)신뢰가 심각하게 손상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아베 총리 역시 요미우리와의 인터뷰에서 "국가간 신뢰관계로 행해온 조치를 재검토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표면적으로는 지난해 10월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이후 양국간 갈등이 쌓여왔고, 일본이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라 분쟁해결 절차인 '중재위원회 구성'을 제안했지만 한국이 별다른 반응이 없자 기다림 끝에 이런 조치를 내놨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악화된 한일관계 외에도 아베 총리가 처한 국내 정치적 상황이 더 큰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 힘을 얻는다. 오는 21일 참의원선거를 앞두고 보수와 극우 지지 세력을 결집시키기 위한 카드로 쓸만한게 한국 도발 밖에 없었다는 분석이다. 아사히신문도 "일본 정부의 이번 조치는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한국을 향한) 의연한 대응을 강조하려는 목적이 있다"고 해석했다.

이번 참의원선거는 아베 총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전이다. 아베 총리의 숙원인 헌법 개정을 하려면 미국 의회로 치면 상원과 같은 역할의 참의원을 장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는 2차 대전 패전 후 헌법에 기재된 군대 보유와 전쟁을 할 수 없다는 내용을 고쳐, 일본을 전쟁가능국으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아베 총리는 내부적으로는 노후 자금 문제로, 외부적으로 외교 무성과로 궁지에 몰려있다. 내부에선 이달초 일본 금융청이 노후 자금으로 연금외에도 2000만엔(약 2억원)이 더 필요하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여론이 들끓고 있다. 정부 스스로 사회보장 수준이 미약하다는 걸 인정한 것 아니냐는 목소리다. 이 때문에 아베 내각의 지지율은 급락했다. NHK가 지난달 24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 아베 내각의 지지율은 2주새 6%포인트나 하락한 42%를 기록했다. 여당인 자민당 지지율도 5.1%포인트 떨어진 31.6%를 나타냈다. 자민당 내에서는 "이 숫자는 선거를 앞두고 정말 위험하다"라는 위기의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이같은 분위기를 반전시키려 아베 총리는 외교 성과를 강조해왔다. 앞서 레이와 시대 개막 후 첫 국빈으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일본으로 초청해 친밀감 과시에 열을 올렸고, 지난달 28~29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서 이를 극대화해 강조한다는 속셈이었다. G20 이후 오히려 '재팬패싱' 등 역효과만 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폐막 기자회견에서 미·일 안보조약이 불공평하며, 무역문제를 두고도, "일본은 연간 수백만대의 자동차를 미국에 보내는데 우리는 고작 밀 같은 농산물을 보내는 게 고작"이라고 말하는 등 아베 총리를 당혹케 했다. 이어진 주말동안엔 남북미 정상이 최초로 판문점 회동을 하자, 일본 언론에서는 "아베가 또 모기장 밖에 놓였다"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아베 총리의 트럼프와의 친밀 외교, 북한을 향한 비난 카드 모두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돼버린 셈이다. 지지율 역시 반등하지 못했다. 참다 못한 아베 총리가 참의원 선거 승리를 위한 반전 카드로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 카드를 꺼내든 것으로 볼 수 있다.

양국간 갈등관계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확실치 않다. 일본이 3개품목 수출 규제 강화에 이어 한국을 아예 이러한 절차를 면제해주는 '화이트 국가'에서 올 8월 빼며 보복을 현실화할 경우 갈등은 커질 수 밖에 없다. 이번 광복절을 맞아 문재인 대통령이 기념사에서 일본에 어떤 메시지를 내놓느냐도 변수가 될 수 있다. 다만 일본 언론을 비롯해 기업들이 이번 조치를 두고 불만을 터뜨리고 있어 참의원 선거 이후 상황이 급진정될 수도 있다. 또 내년 도쿄 올림픽 개최를 앞둔 일본이 이 문제를 장기화 하지 않을 거란 예측도 나온다. 연간 3000만명의 해외관광객을 유치하는 일본은 내년 올림픽에는 이를 4000만명까지 끌어올린다는 계획인데, 일본 방문 해외관광객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한국과 갈등을 오래 끌면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지난 5월 일본이 한국인 비자 제한 문제도 검토했지만, 이를 발동시키지 않은 것도 올림픽 특수를 염두에 뒀기 때문이라는 추측이다.

강기준 기자

일제 강제징용, 첫 소송부터 결론까지 '18년'…재판 과정 어땠나
[the L]2012년 대법원 '개인청구권' 효력 인정…2018년 원고 승소 판결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30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전원합의체에서 이춘식씨(94) 등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대한 판결을 내리기 위해 착석하고 있다. 2018.10.30/뉴스1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30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전원합의체에서 이춘식씨(94) 등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대한 판결을 내리기 위해 착석하고 있다. 2018.10.30/뉴스1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소송은 대체로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소송과 신일철주금(현 일본제철)을 상대로 한 소송으로 나뉜다.

1944년 9~10월 일본 히로시마 구(舊) 미쓰비시중공업 기계제작소와 조선소에 끌려가 강제노동을 한 고(故) 박창환 할아버지 등 6명은 강제노역을 하며 지급받지 못한 임금과 손해배상금 각 1억100만원을 배상해달라며 2000년 5월 부산지법에 소송을 냈다.

피해자들이 모두 고령이라는 점에서 시간이 촉박했지만 법원의 판단은 더뎠다. 1심 재판부는 2007년 2월 "불법행위가 있던 날로부터는 물론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가 이뤄진 1965년부터 따지더라도 이미 10년이 지나 손해배상청구권이 시효 완성으로 소멸했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이듬해 2심도 같은 판단을 내렸다.

뒤늦게 대법원이 2012년 "소멸시효 완성 주장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해 허용되지 않는다"며 원심을 서울·부산고등법원으로 돌려보내면서 승소 가능성이 열렸다.

당시 대법원은 '외국법원 확정판결 효력을 인정하는 것은 대한민국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민사소송법 217조 3항을 근거로 일본 법원의 확정 판결의 효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결하면서 2심 재판을 다시 하라고 결정했다.

대법원은 "일본 판결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한다"면서 "일본 판결을 그대로 승인하는 결과는 그 자체로 대한민국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위반되는 것이 명백해 일본 판결의 효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또 "한일협정에는 개인청구권 소멸에 관해 양국 정부의 의사합치가 있었다고 볼 만큼 충분한 근거가 없다"면서 개인청구권이 유지된다고 결론냈다.

이듬해 7월 다시 열린 2심에서 결국 미쓰비시의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됐지만 정창희(96) 할아버지만 제외하고 피해자 모두 세상을 떠난 뒤였다.

이후 대법원은 2018년 11월 29일 "피해자에게 각 8000만원씩 배상하라"며 원소 승소를 확정했다. 소송을 제기한지 18년만이다. 이 과정에서 한일 양국관계를 의식한 박근혜 정부와 양승태 사법부의 이른바 '재판거래'로 재판이 지연됐다는 의혹이 불거지기도 했다.

이와는 별개로 같은 날 일제시대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제작소로 동원된 근로정신대 피해자 4명과 유족 1명에게 미쓰비시중공업이 1인당 1억~1억5000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는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한 강제징용 소송은 피해자들이 1997년 일본 법원에 소송을 내면서 시작됐다. 2000년대 초반 일본 법원이 소송을 기각했고, 피해자들이 2005년 서울중앙지법에 같은 소송을 냈다.

이후 2008~2009년 1·2심은 "배상 시효가 지났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2012년 대법원은 원심을 파기했고, 2013년 파기환송심 재판부인 서울고법은 피해자 손을 들어줬다.

신일철주금은 이에 불복해 곧바로 대법원에 재상고했지만, 지난해 10월 대법관 전원이 참여하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피해자들에게 1억원씩 배상하라"는 원심 판결을 그대로 선고했다.

이미호 기자

국가간 조약으로 개인 권리를 없앨 수 있을까
[the L] [준비안된 한일 경제전쟁]대법원 "개인 권리를 국가가 대신 포기하려면 조약상 명확한 근거 필요"…한일 청구권조약엔 없었다

[MT리포트-下]둘다 지더라도? '韓경제보복' 꺼낸 아베의 이유
국가들 사이에 맺는 '조약'을 통해, 국민의 청구권을 소멸시킬 수 있을까. 우리 대법원은 지난해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전범기업을 상대로 낸 위자료청구소송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그렇다'고 판단했다. 김소영, 이동원, 노정희 대법관이 제시한 별개의견을 통해서다.

앞서 지난해 내려진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핵심 쟁점은 한일 양국이 국교정상화 과정에서 1965년 6월 22일 맺은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하 청구권협정)에서, 대한민국 국가가 아닌 개별 '국민'이 갖는 손해배상청구권 역시 청구권협정의 규율대상에 포함되는지 여부였다.

청구권협정은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으로서 본 협정의 서명일에 타방체약국의 관할하에 있는 것에 대한 조치와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타방체약국 및 그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으로서 동일자 이전에 발생한 사유에 기인하는 것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엔 한국 '국민'의 손해배상청구권도 포함된다고 해석할 경우,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청구권을 주장할 수 없게 된다.

대법원은 별개의견에서 한일 청구권협정 및 그에 관한 양해문서 등의 문언, 청구권협정의 체결 경위나 체결 당시 추단되는 당사자의 의사, 청구권협정의 체결에 따른 후속 조치 등의 여러 사정들을 종합해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다"고 판단한다. 즉, 국가간 조약으로 국민의 청구권을 제한 또는 소멸시키는 것이 원칙적으로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대법원 별개의견은 그러나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여전히 청구권을 주장할 수 있다"고도 판단했다. 조약으로 청구권 제한이 가능하기는 하나, 국가가 개인의 청구권을 포기 내지 소멸시키려면 그에 대한 명확한 근거가 필요한데 청구권협정은 그 문언상 개인청구권 자체의 포기나 소멸에 관하여는 아무런 규정도 두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개인이 갖는 청구권의 제한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대법원은 "협정을 통해 국가가 '외교적 보호권(diplomatic protection)', 즉 '자국민이 외국에서 위법·부당한 취급을 받은 경우 그의 국적국이 외교절차 등을 통하여 외국 정부를 상대로 자국민에 대한 적당한 보호 또는 구제를 요구할 수 있는 국제법상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개인의 청구권까지도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다고 보려면 적어도 해당 조약에 이에 관한 명확한 근거가 필요하다"고 봤다.

대법원은 "청구권협정에는 개인청구권 소멸에 관하여 한일 양국 정부의 의사합치가 있었다고 볼 만큼 충분하고 명확한 근거가 없는 점 등에 비추어 갑 등의 개인청구권 자체는 청구권협정으로 당연히 소멸한다고 볼 수 없고, 청구권협정으로 그 청구권에 관한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만이 포기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갑 등은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소로써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권리의 '포기'를 인정하려면 그 권리자의 의사를 엄격히 해석하여야 한다는 법률행위 해석의 일반원칙에 의할 때, 개인의 권리를 국가가 나서서 대신 포기하려는 경우 이를 더욱 엄격하게 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법원은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표현이 사용되기는 하였으나, 위와 같은 엄격해석의 필요성에 비추어 이를 개인청구권의 ‘포기’나 ‘소멸’과 같은 의미로 보기는 어렵다"면서 "연합국과 일본 사이에 1951. 9. 8.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연합국은 모든 보상청구, 연합국과 그 국민의 배상청구 및 군의 점령비용에 관한 청구를 모두 포기한다'라고 정해 명시적으로 청구권의 포기(waive)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과 구별된다"고 판단했다.

별개의견은 따라서 한일청구권협정의 문언상 의미가 명확하지 않은 이상 청구권협정에서 사용된 '해결된 것이 된다'거나 주체 등을 분명히 하지 아니한 채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는 등의 문언은 의도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야 하고, 이를 개인청구권의 포기나 소멸, 권리행사제한이 포함된 것으로 쉽게 판단하여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냈다.

현행 헌법은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해 국민의 권리를 법률로 제한할 수 있고, 국회의 동의를 얻은 조약 등은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국가간 조약에 의한 국민 권리의 제한, 소멸도 원칙적으론 가능하다.

다만 국민의 권리를 제한하기 위해서 근거되는 법률이 명확성과 구체성을 띄어야 하는 것처럼, 조약을 통해 국민 권리를 제한하기 위해선 법률과 동일한 수준으로 명확하고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게 대법원의 입장인 셈이다.

백인성(변호사) 기자

"일본 기업, 강제징용 피해자에 배상" 판결 이후…커진 한일 갈등
[the L]일본 정부, 중재위 설치 요구 이어 1일 경제 보복 조치 감행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중 유일 생존자인 이춘식 할아버지가 지난해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전원합의체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사진=뉴스1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중 유일 생존자인 이춘식 할아버지가 지난해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전원합의체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사진=뉴스1
한국 대법원이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을 강제로 끌고가 노역을 시킨 일본 기업들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이후 한국과 일본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이제는 급기야 경제 제재로까지 번지는 모양새다.

지난해 10월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소영 대법관)는 이춘식씨 등 4명의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신일본제철(옛 일본제철)을 상대로 각 1억원씩을 배상하라고 낸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린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소송 제기 13년여 만에 내려진 대법원 판단이었다.

◇ 한국 "대법원 판결 존중" vs 일본 "중재위 설치"…좁혀지지 않는 입장

일본은 즉각 반발했다. 아베 총리는 "이번 판결은 국제법에 비춰 있을 수 없는 판단"이라며 일본 주재 한국 대사를 불러 항의했다. 일본 측은 지난 1월 한일 청구권협정상 분쟁 해결 절차인 '외교적 협의'를 우리 정부에 요청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이에 응하지 않았고, 일본 정부는 지난 5월20일 제3국이 참여하는 중재위원회 설치를 요청했다.

중재위 개최 요구는 '한일청구권협정 해석·이행 과정에서 분쟁이 생겼을 땐 양국 간 협의를 진행하거나 제3국 참여 중재위를 구성토록' 한 청구권협정 제3조를 근거로 한 것이다. 3조 2항은 중재위 설치 요청에 대해 상대국은 30일 이내에 중재위원을 임명토록 했다. 또한 3항은 이 기간 내에 중재위원이 임명되지 않았을 경우 제 3국이 중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다만 해당 조항은 강제 사항이 아니어서 한쪽에서 거부하면 중재위 설치는 이뤄질 수 없다.

우리 정부는 일본 측의 중재위 개최 요구에도 응하지 않았다. 정부는 강제징용 피해 배상판결 논의를 위한 중재위원회 개최 응답시한이었던 18일 "대법원 판결을 존중한다는 기본 입장 하에서 피해자 고통과 상처의 실질적 치유 그리고 미래지향적 한일관계 구축 필요성 등을 고려해 관련 사안을 신중하게 다뤄오고 있다" 원론적인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가나스기 겐지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이 지난 3월 김용길 외교부 동북아국장과의 면담을 위해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부 청사로 들어서고 있다./사진-뉴스1가나스기 겐지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이 지난 3월 김용길 외교부 동북아국장과의 면담을 위해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부 청사로 들어서고 있다./사진-뉴스1
◇ 더 깊어지는 갈등의 골…이제는 '경제 보복'까지

상황은 더 나빠졌다. 최근 일본 정부는 방위계획대강을 발표하며 한국을 안보협력 대상국 2위에서 5위로 변경했다. 지난달 28~29일 오사카 G20 정상회의에선 한-일 정상회담이 불발됐다.

급기야 1일 일본 정부는 다음달부터 디스플레이·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소재에 대한 수출 규제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강제징용 문제로 인해 경색된 한일 관계에서 가장 큰 우려로 꼽혔던 한국 업체에 대한 경제 제재가 현실화된 것이다.

외신과 업계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이날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제조 과정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플루오린폴리이미드 △레지스터 △에칭가스 등 3개 품목에 대해 한국 수출규제 조치를 발표한다고 보도했다.

또 일본 정부는 첨단 소재 등의 수출에 대한 수출 허가 신청이 면제되는 외환 우대 제도인 '화이트 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할 예정이다. 일본 정부는 7월 1일부터 약 한 달간 이에 대한 공청회를 실시해 의견을 수렴하고, 8월 1일부터 제외조치를 발효한다는 목표다. 최근 디스플레이·반도체 업계가 미중 무역전쟁으로 인해 직격탄을 맞은 데 이어, 일본 정부의 필수 소재 수출 규제까지 현실화될 경우 '엎친데 덮친격'이 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 법원에선 "일본 전범기업,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배상해야" 판결 우르르

한편 한국 법원에서는 강제징용 문제와 관련해 일본 전범기업들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이 줄지어 나오고 있다. 대법원 판결 이후 그 판결 취지에 맞는 하급심 판단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지난달 26일 서울고법 민사13부(부장판사 김용빈)는 곽모씨 등 강제징용 피해자 7명이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1심과 같이 "신일철주금이 1인당 1억원씩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지난달 27일에도 강제징용 피해자 홍모씨 등 14명과 그 가족들이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1심에 이어 2심도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았다.

안채원 기자

이 기사의 관련기사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