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걸려 아내 죽인 남편, 처벌만 답일까? [황국상의 침소봉대]

머니투데이 황국상 기자 2019.06.2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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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 서울고법, 살인 혐의 치매 피고인 및 폭행혐의 알코올 중독자에 치료구금 시범실시 선언

치매걸려 아내 죽인 남편, 처벌만 답일까? [황국상의 침소봉대]




"피고인을 징역 ○○년에 처한다." 형사재판에서 죄를 저지른 피고인들에게 재판부가 낭독하는 주문의 형태입니다. 죄를 저지른 이는 피의자에서 피고인으로 신분이 전환되고 공개재판에서 죄를 저질렀는지 등에 대해 면밀히 검토를 받은 후 사법당국으로부터 죄를 인정받아 처벌을 받습니다.

처벌은 크게 생명형과 자유형, 재산형, 명예형 등으로 나뉩니다. 이 중 생명형, 즉 사형과 자유형은 피고인을 일정 기간 또는 영원히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등 방식으로 집행됩니다. 즉 △죄를 확인하고 △처벌수위를 결정한 후 △사회에서 일정기간 배제·추방하는 식입니다. 전통적인 형사사법이 취해온 방식입니다.



서울고법이 최근 새로운 방식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배제·추방이 아닌, 치료적 관점에서 형사사건을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모든 범죄에 다 적용될 수는 없겠지만 과거에 비해 많은 이들이 정신적 압박을 받는 데다 고령화까지 심화되는 시대에 전통적인 형사사법 방식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을 법원이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처벌 이외의 대안을 모색할 필요성 인식한 법원
지난 19일 오전 서울고법 형사1부(부장판사 정준영)에서는 두 개의 항소심 첫 공판이 진행됐습니다. 중증 치매를 앓다가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5년 선고를 받았으나 자신이 아내를 살인한 줄도 모르고 있는 60대 후반의 A씨, 중증 알코올 중독으로 상습적으로 가족을 폭행했다가 1심에서 징역형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으나 1심 선고 후 사흘만에 재차 범행을 저지르고 구속수감된 상태로 2심 재판을 받는 60대 중반의 B씨의 사건이었습니다.



가족들이 피해를 입은 이들 사건의 공통점은 피고인의 가족이자 피해자의 유가족이기도 한 이들이 피고인에 대한 선처를 재판부에 적극 호소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에 재판부는 A,B씨에 대해 △가족들이 장기입원 치료가 가능한 병원을 섭외하고 △재판부를 납득시킬 만한 치료계획을 가져오면 △직권으로 보석(보증금부 석방)을 허가하고 △매달 치료진행 경과를 살펴보겠다는 것을 공개법정에서 선언했습니다.

재판부는 시범적으로 이번 사건을 '치료법원' 개념으로 진행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미 우리 사회가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데다 정신적 압박을 받는 이들도 급증한 상황에서 과거의 '배제·추방' 식의 처벌만으로는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자신이 아내를 살해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는 이를 교정시설에 구금해서 강제노동에 처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과거의 전통적인 형사사법이 새로운 환경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지에 대해 법원이 적극적으로 대안을 모색한 것입니다.

내달 17일 A,B씨 사건의 후속 공판이 잡혀 있지만 가족들이 보석신청서를 제출할 경우 현재 구속상태로 재판을 받는 A,B씨는 공판기일 전이라도 석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자유인의 신분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A,B씨의 구금장소가 종전 구치소에서 병원으로 변경되는 것 뿐입니다. 이것만으로도 큰 차이가 생길 수 있습니다. 구치소에서 자유가 제한된 상태로 아무런 치료를 받지 못해 병세가 악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만 해도 큰 차이입니다.


공교롭게도 A,B씨 재판을 맡은 이 재판부의 재판장인 정준영 부장판사(52·사법연수원 20기)는 종전까지 서울회생법원의 수석부장판사를 지냈습니다. 회생법원은 여느 법원과 달리 법원이 주도적으로 관여해 채무자와 채권자 사이의 이해관계를 조율해 도산 상황에 놓인 개인·기업이 조속히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돕는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곳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정 부장판사는 앞서 2013년 인천지법 부천지원장으로 지낼 당시 국내 최초로 '회복적 사법' 프로그램을 시범적으로 실시하는 데 참여한 경험도 있습니다. 단지 가해자를 단죄 개념으로 처벌하고 배제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가해자의 반성과 피해자의 용서를 형사절차에 도입하도록 해 사회적 손실의 최소화를 도모하는, 과거 형사사법 시스템을 보완하기 위한 프로그램이 바로 '회복적 사법' 프로그램이었습니다. A,B씨 사건은 범죄를 법률에 의해 판단해서 처벌을 내리는 기계적 사법을 뛰어넘어 근본적 문제해결을 위해 법원이 적극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끕니다.

◇한국형 치료법원, 과제는?
미국에는 '치료법원'이 정식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 전역 300여곳이 넘는 각급 법원에 '치료법원'(한국어로는 정신건강법원, Mental Health Court)이 설치돼 정신질환에 의해 범죄를 저지른 이를 '피고인'이 아닌 '환자'로 보고, 처벌이 아닌 '치료'에 방점을 두고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이라고 합니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판사 뿐 아니라 검사, 의사 등 다양한 전문가들이 모여 환자의 개선을 위해 고민한다"며 "처벌로 끝내지 않고 '환자'에 대한 치료가 완료될 때 박수로 법정을 떠나게 해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A,B씨의 사례는 정식으로 '치료법원' 규정이 없는 상황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습니다. 재판부는 형사소송법상 '보석' 조항을 이용해 재판을 진행할 것으로 보입니다. 보석은 피고인이 구치소에서 자택 등으로 거주지가 바뀔 뿐 재판에 제때 출석해서 재판을 받을 의무는 그대로 유지됩니다. A,B씨가 공개법정에 매번 나와 재판을 받는 게 어렵습니다. 대신 재판부가 매달 병원에 찾아가 보석요건에서 정한 치료가 제대로 진행되는지를 살피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렇지만 A,B씨에 대한 치료비용은 오롯이 가족들이 부담해야 합니다. 치료법원 개념으로 사건을 처리할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은 탓입니다. 보석 규정을 활용한 이번 서울고법의 A,B씨 사건의 처리방식은 치료법원 규정 미비로 인한 미봉책일 뿐이라는 얘기입니다. 입법부와 행정부 차원의 조력도 이번 시도가 성공하기 위한 관건입니다. 결국은 입법적인 뒷받침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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