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5·18]2019년, 아직 고립된 광주](https://thumb.mt.co.kr/06/2019/05/2019051615227693759_1.jpg/dims/optimize/)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을 거치며 '달달' 외웠던 교과서에서 알려주는 5·18은 그 정도였다. 그 이상 알고, 배우고, 느낄 여건이 되지 않았다. 지금이야 흔히 접할 수 있는 당시의 사진과 영상도 접할 길이 없었다.
부모님만이 아니라 온 가족이 오래 전부터 경북을 기반으로 살아온 집안이다 보니 주변에서도 5·18을 직접 경험한 이가 전무했다. 시민의식을 형성하던 10대와 20대 초반까지, 어느 곳에서도 관련된 얘기를 들은 적은 없었다. 오히려 종종 들려오는 '조작설'과 같은 음모론 따위가 귀를 솔깃하게 할 뿐. 그렇게 1980년 광주는 내게 고립된 곳이었다.
승합차 한 대를 빌려 다같이 광주를 찾기도 했다. 그곳에선 구금된 사이 학생운동 동지들이 모두 '행불'된 친구 아버지의 얘기를 들었다. 비무장지대(DMZ)에서나 볼 수 있는 총탄자국을 광주 시내 한복판에서 보며 공포도 느꼈다. 그렇게 역사책 속에 고립돼 있던 5·18은 내 삶으로 흘러들었다. 광주의 소식이 '제대로' 내게 닿았다.
하지만 아직도 그때의 광주에는 누명과 오명이 끊임없이 덧씌워진다. 심지어 국회에서도 연례행사처럼 망언하고, 사과를 요구하고, 오열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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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바라보는 이들은 "어떻게 광주를 흔드느냐, 그리고 어떻게 휘둘리느냐"고 분노한다. 하지만 광주를 제대로 몰랐고, 뒤늦게 안 내 생각은 다르다. 분노하는 쪽에서는 '최소한의 상식선'이라고 하지만, 그동안의 교육과정을 보면 그 상식이 제대로 형성됐는지도 의문이다.
광주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제대로 모르니 흔들기 쉽고, 또 끊임없이 흔들린다. 더 알리고, 더 파헤쳐야 한다. 택시 한 대 못 빠져나오게 고립됐던 1980년의 광주. 그 나비효과는 2019년의 막말로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