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줄기가 모여 바다로'…지구 반대편, '민족·경제 공동체 건설'의 꿈

머니투데이 보스톤‧뉴욕(미국)=강주헌 기자 2019.05.15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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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300][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나라를 세운 기업][5]-①미국 동부 독립운동, 유학생 주축…경제활동·독립운동 병행 '안간힘'

편집자주 1919년 4월10일.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의정원(현 국회)이 개원했고, 하루 뒤인 11일 임시정부가 설립됐다.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겠다”는 민족의 염원이 담긴 이곳은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가는 시작점이었다. 같은해 3.1운동을 비롯해 임정을 중심으로한 독립운동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이때 민족기업들이 나섰다. 이들 기업 창업주는 사재를 털어 독립 자금을 댔고, 기업의 이윤을 나라 구하는데 썼다. 머니투데이는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 설립 100주년을 맞아 당시 민족기업의 자취를 취재했다. 이들 기업이 100년 후 지금 기업에게 남긴 메시지를 5회에 걸쳐 보도한다.

'물줄기가 모여 바다로'…지구 반대편, '민족·경제 공동체 건설'의 꿈


보스톤‧뉴욕‧필라델피아(펜실베이니아) 등 미국 동부에서 펼쳐진 독립운동은 한국인의 유학과 이민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한인들은 가난한 나라 출신의 고학생 혹은 노동자로 살았다. 국권이 침탈된 설움 속에서도 배우기 위해, 벌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공동체를 잃은 그들은 미국에서 한인 공동체 형성은 물론 독립운동을 위해 애썼다.


1903년 시작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이민으로 1905년까지 약 7200명이 도착했다. 첫 이민단에는 안창호, 이승만 등 유학생이 포함됐다. 1930년대 들어선 다수의 유학생들이 기독교 단체의 후원으로 하버드대, MIT, 보스톤대 등에서 수학했다.


100년 전 유학생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대표적인 곳이 보스톤이다. 청년 이승만은 1907년 여름 보스톤에 와서 하버드대 석사 과정을 밟았다. 이승만이 박사학위를 받은 뉴저지주 소재 프린스턴 대학이 2012년 이승만 홀을 개관할 만큼 그에 대해 조명하고 있지만 보스톤에서의 흔적은 찾기 어려웠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07년 하버드대에서 수학할 때 기숙했던 케임브리지시 섬너 로드 12번지. /보스톤(미국)=강주헌 기자이승만 전 대통령이 1907년 하버드대에서 수학할 때 기숙했던 케임브리지시 섬너 로드 12번지. /보스톤(미국)=강주헌 기자







하버드대의 기록저장소인 하버드 아카이브에 따르면 이승만은 대학 인근의 케임브리지시 섬너 로드 12번지에서 기숙했다. 이승만의 면담표에 자필로 기록된 주소가 발견된 것이다. 그가 기숙할 당시 어떤 방을 썼는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건물은 기본 골격을 유지한 채 남아있다.


이승만 이전에 최초 한국인 유학생은 유길준이다. 유길준은 1883년 고종이 파견한 보빙사절단원 중 한 명으로 미국을 방문했다가 보스톤에 혼자 남았다. 그는 보스톤 인근의 샐럼시에서 거버너 더머 아카데미(현 거버너스 아카데미) 등에서 수학한 뒤 보스톤대에 입학했으나 갑신정변으로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하고 귀국했다.



거버너스 아카데미가 2012년 개교 250주년 맞아 그린 벽화에는 유길준의 모습이 크게 그려져 있다. 벽화의 유일한 동양인이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인 피바디에섹스 박물관은 2003년 유길준관을 설치했다. 그가 쓴 갓 등이 이곳에 남아있다.

미국 보스톤 유학생들의 단체 활동 근거지가 됐던 보스톤대 신학대학. 유학생들이 실제로 모여 회의를 나눈 장소인 머쉬룸(marsh room). /보스톤(미국)=강주헌 기자미국 보스톤 유학생들의 단체 활동 근거지가 됐던 보스톤대 신학대학. 유학생들이 실제로 모여 회의를 나눈 장소인 머쉬룸(marsh room). /보스톤(미국)=강주헌 기자





보스톤대 신학대학 지하에 있는 머쉬룸(Marsh room)은 유학생 단체 활동의 근거지로 자리잡았다. '깨어 있는 의식'을 갖고 있는 유학생들의 매개체는 당시 개화된 학문인 기독교였다.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며 한인 공동체 건설과 경제활동, 그리고 독립운동에 대한 치열한 토론이 이뤄졌다. 유학생들의 정신은 현재도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보스톤한인교회로 이어졌다.

뉴욕 한인들이 모여 예배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뉴욕한인교회. /뉴욕(미국)=강주헌 기자뉴욕 한인들이 모여 예배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뉴욕한인교회. /뉴욕(미국)=강주헌 기자



유한양행의 설립자 유일한도 보스톤에서 활동했다. 그는 1920년 제너럴 일렉트릭(GE)의 회계사로 근무하면서 한국친우회 보스톤지부 비서로 활동했다. 단체의 운영자금을 기부하고 미국인을 상대로 단체 가입을 권유했다.




유일한은 1919년 펜실베이니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1919년 4월 대한인국민회 한인대회에서 재미한국인 대표로도 참가했다. 독립운동 후원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선전이 목적이었다.


미국의 경제 도시 뉴욕, 그중에 세계 최고의 번화가 맨해튼에도 '공동체 건설'의 숨결이 스며있다. 주 거점지는 1921년 창립된 뉴욕한인교회다. 한인 유학생들이 구성원의 주축이었다. 단순한 신앙공동체 역할만이 아니라 민족과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공동체로 활동했다. 1930년에 한국경제회를 발족하고 '산업'이라는 경제잡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이곳은 현재는 건물 신축 공사 중이다.


유일한이 한국의 경제부흥을 준비하기 위해 설립한 고려경제회가 있었던 건물. /뉴욕(미국)=강주헌 기자유일한이 한국의 경제부흥을 준비하기 위해 설립한 고려경제회가 있었던 건물. /뉴욕(미국)=강주헌 기자

유일한은 보스톤에 이어 뉴욕에서도 활약했다. 1943년 고려경제회를 설립했다. 조국의 근대적인 산업과 경제건설을 준비하기 위한 비정치적인 단체였다. '코리아 이코노미 다이제스트'라는 경제잡지도 정기적으로 발행했다.


3‧1운동 기념행사도 1921년 맨해튼 중심에 위치한 타운홀에서 열렸다. 서재필이 행사를 주관하고 연설했다. 약 1300명의 참석자 중 대부분은 미국인이었다. 독립운동시기 3ㆍ1절 기념행사의 옥내집회로는 미주 한인사회뿐만 아니라 전체 한인사회에서 가장 큰 규모로 평가된다.

뉴욕 한인유학생들의 거류지이자 집회를 열었던 인터내셔널 하우스. /뉴욕(미국)=강주헌 기자뉴욕 한인유학생들의 거류지이자 집회를 열었던 인터내셔널 하우스. /뉴욕(미국)=강주헌 기자



뉴욕 한인유학생들이 거류하면서 집회를 열었던 곳인 인터내셔널 하우스도 여전히 남아있다. 1924년 개관한 이곳에서 3‧1운동 이후 급증한 미국 유학생들이 활동의 터전으로 삼았다. 이들은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에서 활동하면서 유학생 동부대회를 매년 열었다.


국내에서도 '공동체'를 위한 움직임이 있었다. 대한천일은행(현 우리은행) 대한제국시기와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제일은행을 비롯한 외국계 은행 진출에 맞서는 역할을 했다. 상인층이 중심이 되고, 고종 황제가 창립자금(창립자본금의 54%)을 지원했다. 조선 상인들에게 자금을 지원해 결과적으로 이들을 보호하며 상권 공동체 확립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 사진제공=외부사진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 사진제공=외부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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