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눈에 '중국산 산업용 가스' 넣은 병원…법원 "과실 있다"

머니투데이 백인성 (변호사) 기자 2019.05.0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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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성의 주말법률사무소] 환자 세 명 연속 눈에 의료용 가스 대신 산업용 가스 사용해 시력손상…"그래도 설명할 의무 없다"

편집자주 대법원까지 올라가는 사건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의 사건들은 대부분 1,2심에서 해결되지만 특별한 사건이 아니면 잘 알려지지 않는 게 현실입니다. 재판부의 고민 끝에 나온 생생한 하급심 최신 판례, 눈길을 끄는 판결들을 소개해드립니다. 격주 주말마다 지면 위에 조그만 법률사무소를 열어봅니다. 조금이나마 우리네 생활에 도움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

사람 눈에 '중국산 산업용 가스' 넣은 병원…법원 "과실 있다"


환자의 눈을 고친다며 '의료용 가스' 대신 반도체 생산 등에 쓰이는 중국산 '산업용 가스'를 공급받아 안전성 검사 없이 사용했고, 환자의 시력이 나빠졌다면 병원은 책임을 져야 할까요. 같은 수술을 받은 앞서 환자들의 건강이 나빠졌다는 사실을 병원이 환자에게 알리지 않았다면 병원은 설명의무를 위반한 걸까요?

이에 대한 답이 마침내 나왔습니다. 지난 2015년 제주대병원에서 일어난 논란의 의료사고 판례를 소개해 드립니다.



4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제15민사부는 제주대병원에서의 눈 시술 이후 시력이 크게 나빠진 40대 경찰관 A씨가 제주대학교병원과 ㈜케이비손해보험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에서 "병원이 A씨에게 1억900만원, 그 처와 자녀에게 위자료 700만원을 배상하라"며 지난 1일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했습니다.
사람 눈에 '중국산 산업용 가스' 넣은 병원…법원 "과실 있다"


◇환자 눈에 의료용 가스 대신 '반도체용 가스'…겨우 손가락 셀 정도로 시력 악화


판결문의 기초 사실관계를 종합하면, A씨는 지난 2014년 오른쪽 눈의 시력이 나빠져 방문한 제주대병원에서 눈 안쪽에 공간이 생기는(황반부 박리) 이상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이를 치료하지 않으면 시력이 0.1 이하로 떨어지게 될 가능성이 있는데요. 이에 A씨는 2015년 2월 11일 제주대병원에서 안구에 'C3F8(과불화프로판)' 가스를 주입하는 시술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시술 닷새 후 다시 방문해 잰 A씨의 시력은 좋아지기는커녕 '눈앞의 손가락을 세는 게 가능할 정도(겨우 눈앞에 손가락을 가져와야만 몇개인지 셀 수 있을 정도)'로 나빠졌습니다. A씨의 노동능력 상실률은 24%(영구장애)에 이르렀습니다.



문제의 원인은 시술에 사용된 가스였습니다.

제주대병원은 2015년 1월 해당 가스를 새로 구입했는데, 가스를 판 회사는 의약품을 취급하는 회사가 아니었습니다. 병원이 산 가스 역시 의료용이 아니라 '반도체 생산' 등 산업용으로 수입된 제품이었습니다. 제주대병원의 서류상으론 해당 가스의 안전성, 특히 눈 등 인체에 직접 사용했을 때의 안전성에 대한 내용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또 병원은 가스를 산 후 업체 측에 인체무해성 등 안전성 검증 여부에 대해 확인하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이 병원에선 A씨 시술 이전 동일한 가스로 같은 가스주입시술을 받은 환자 2명이 이미 있었는데, 이들은 '손을 흔드는 것이 겨우 보일 정도의 시력'으로 시력이 나빠진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병원 의료진은 수술 이전 A씨에게 이를 알리지 않았습니다.


병원은 2015년 2월 말 가스를 다시 교체했고, 이후로는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시력을 잃은 경찰관 A씨는 제주대병원에 3억6500만원을 청구하는 손해배상소송을 냈습니다. △산업용 가스를 사용한 과실 △의료진이 이미 같은 시술을 받은 환자들에게 시력 손상이 발생했음에도 가스 이상 가능성을 조사하지 않았다는 등 시술상의 과실 △닷새간 안압 검사를 하지 않는 등 경과관찰의무 위반으로 인한 과실 △지도설명의무 위반 △다른 환자가 이미 있었음에도 이를 알리지 않은 데 대한 설명의무 위반 등의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병원 측은 법정에서 "가스에 대해 위험성을 알 수 없었고, 안압 검사를 하지 않았더라도 시력 저하와의 관계가 없고, 시술상의 과실이 없었으며, 같은 가스주입술 시술을 받은 환자들의 건강이 나빠졌더라도 그 상태에 대해서까지 환자에게 설명할 의무를 부담하진 않는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이 사건의 주된 쟁점은 평소 가스를 공급받던 업체로부터 산업용 가스를 받은 후 별다른 검사 없이 사용한 것이 병원측의 주의의무 위반인지, 그리고 동일 시술을 받은 다른 환자의 건강이 악화되었는데 이를 알리지 않은 것이 병원의 설명의무 위반인지 유무였습니다.

◇"병원, 의약품 안전성 검증 확인할 업무상 주의의무 있다"

법원은 우선 병원이 의료용 가스가 아닌 산업용 가스를 환자의 눈에 불어넣은 부분에 대해선 병원의 주의의무 위반이 인정돼 A씨가 시력을 잃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인정했습니다.

현행법상 병원에서 가스주입술에 사용되는 산업용 가스는 '사람의 질병을 치료할 목적으로 사용하는 물품 중 기계 또는 장치가 아닌 것'에 해당해, 약사법상의 '의약품'에 해당됩니다. 의료용 고압가스는 관련 법규에 따라 다른 의약품과 동일하게 제조 및 품질관리 규제를 준수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일반 의약품 규제 외에도 추가적인 규제를 받고 있습니다.

법원은 "법 취지상 눈에 직접 주입하는 가스를 의약품에 사용할 때는 엄격한 규제를 받는 '의료용 가스'를 사용할 의무가 있고, 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최소한 그 가스성분에 대해 충분한 안전성 검증이 됐는지 여부에 대해 반드시 확인해야 할 업무상 주의의무가 있다"며 "제주대병원은 이러한 주의의무를 위반해 만연히 의약품으로 규제를 전혀 받지 않고 안전성도 검증되지 않은 산업용 가스를 구입해 사용하도록 한 과실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법원은 이어 "환자 나이가 젊고 가스 자체의 변질이나 가스에 섞인 불순물 등 독성물질에 의한 혈관폐쇄로 추정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대한의사협회의 의견, 동일한 가스를 이용한 가스주입술을 받은 2명의 환자에게서 동일 사고가 발생하고 가스 교체 후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점을 보면 병원의 과실로 환자에게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고 보았습니다.

◇"이전에 동일시술 받은 환자 건강 악화됐어도 설명할 의무 없어"

그러나 법원은 "병원이 A씨에게 가스 자체의 위험성이나 다른 환자들의 상태에 대해선 설명할 의무를 부담하지 않는다"며 설명의무 위반 책임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의사는 환자에게 수술 등 나쁜 결과발생의 가능성이 있는 의료행위나 사망 등 중대한 결과발생이 예측되는 의료행위를 하게 되는 경우, 환자에게 질병의 증상이나 치료방법 내용 및 필요성, 발생 가능한 위험 등에 대해 당시의 의료 수준에 비추어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사항을 말해줄 의무가 있습니다. 환자가 의료행위를 받을지 여부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함입니다. A씨는 병원이 이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는데요. 그 사실을 알았다면 당연히 제주대병원에서 가스주입시술을 받지 않았을 것이란 얘기입니다.

법원은 그러나 "의사에게 의료행위로 인해 예상되는 위험이 아니거나 당시 의료수준에 비춰 예견할 수 없는 위험에 대한 설명의무까지 부담하게 할 수는 없다"며 "A씨 사고는 가스 자체의 문제로 발생했는데, 의료진이 가스에 문제가 있다고 예견하거나 시술 전 가스주입술을 받은 환자 2명의 시력이 악화된 게 가스 때문이라고 예측하기 어려운 점을 감안해야 한다"고 봤습니다.

법원은 이어 A씨의 다른 주장에 대해서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법원은 A씨가 주장한 시술상 과실에 대해 "해당 가스가 가스주입술에 널리 사용되는 점, 사고 이전에 가스 관련 문제가 보고된 적이 없는 점 등에 비춰 의료진이 시술 이전에 가스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았다거나 이상 여부를 확인했어야 한다고 인정하기에 부족하다"고 배척했습니다. 경과관찰의무 위반 등에 대해서도 역시 사고와 인과관계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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