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O 개혁"… 후쿠시마 분쟁 진 아베 뒤끝?

머니투데이 세종=권혜민 기자, 유영호 기자 2019.05.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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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통-⑮]"WTO 분쟁 해결 기능 개혁 불가피" 국제 여론전 펼치는 아베 일본 총리…후쿠시마 수산물 분쟁 패소 관련 불만 표출로 읽혀

"WTO 개혁"… 후쿠시마 분쟁 진 아베 뒤끝?


"세계무역기구(WTO) 분쟁해결 기능의 개혁이 불가피하다."

지난달 유럽과 북미 순방길에 나선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각국 주요 정상들과의 면담에서 공통적으로 강조한 말이다. 아베 총리는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캐나다 오타와에서 저스틴 트뤼도 캐나다 총리와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WTO의 분쟁해결 방법에 문제를 제기하며 "G20 의장국으로서 WTO 개혁에 공헌하겠다"고 말했다.

앞선 25일(현지시간)에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도날드 투스크 유럽연합(EU) 정상회의 상임의장, 장클로드 융커 EU 집행위원장과 회담한 뒤 "G20이 자유무역의 추진과 WTO의 개혁에 대해 강력한 메시지를 국제사회에 던져야 한다"며 WTO 개혁을 위해 EU와 연대하겠다고 밝혔다.



아베 총리가 말하는 'WTO 개혁'은 최근 국제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 중 하나다. 1995년 출범한 WTO는 '다자간 자유무역체제의 상징'으로서 국가간 무역분쟁을 중재하고 세계무역질서를 유지하는 '중심추' 역할을 해 왔다. 하지만 자국우선주의 기조가 전세계로 퍼지면서 역사상 최대 위기를 맞았다. 그 중심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6년 취임 이후 줄곧 'WTO 무용론'을 펼치고 있다. 지금의 WTO 무역분쟁 시스템이 개도국에 유리한 구조인 탓에, 미국은 '편파 판정'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미국의 '몽니'는 분쟁해결기구(DSB) 상소위원 임명 문제로 이어졌다. DSB는 WTO 분쟁의 최종심(2심)을 담당하는 '대법원' 역할의 기구다. 총 7명의 위원으로 구성되는데, 지난해 9월 스리 바부 체키탄 세르반싱 위원의 임기가 종료되면서 현재는 최종심 재판부 구성에 필요한 최소인원인 3명으로 운영 중이다. 새 상소위원을 선임하려면 164개 회원국 모두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데, 미국이 아예 신규위원 선임 절차를 '보이콧'하고 있어 임명이 어려워졌다. 올해 12월이면 위원 2명의 임기가 추가로 끝나 1명만 남는다. 그때까지 미국이 입장을 바꾸지 않는다면 WTO의 분쟁 해결 시스템은 완전히 마비된다.



이에 일부 WTO 회원국들은 분쟁해결 체제의 붕괴를 막기 위해 구조개혁에 나섰다. WTO 체제의 수혜를 많이 본 한국도 이 움직임에 동참하고 있다. WTO 개혁을 다루는 비공식 통상장관회의에 참석하는 등 조속한 WTO 정상화를 주장하고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5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도날트 투스크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장클로드 융커 EU 집행위원장과 일본-EU 정상회의를 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AFP=뉴스1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5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도날트 투스크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장클로드 융커 EU 집행위원장과 일본-EU 정상회의를 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AFP=뉴스1
하지만 최근 일본의 주장은 단순히 WTO의 미래를 걱정해서 나온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아베 총리가 'WTO 개혁'을 강조하고 나선 시점이 한국과의 후쿠시마 수산물 분쟁에서 최종 패소한 직후이기 때문이다. 지난달 12일 WTO DSB는 후쿠시마 주변 8개현에서 나는 수산물의 수입금지를 결정한 한국 정부의 조치가 WTO 협정을 위반하지 않는다고 판정했다. 같은달 26일에는 전 회원국이 참석하는 정례회의에서 이 최종판정을 공식 채택했다. 일본 정부는 23일 국장급 협의에서 우리 정부에 수산물 수입금지 조치의 철폐를 다시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궁지에 몰린 일본이 WTO 구조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며 판정 결과에 흠집을 내려는 의도가 깔린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실제로 아베 총리는 WTO 개혁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이번 후쿠시마 수산물 관련 판정이 부당하다는 점을 직접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이 주로 문제삼는 상소위원 부족 문제는 미국의 위원 선임 반대에서 비롯된 결과다. 현재 상소위원 추가 선임이 막힌 상황이지만 판정에 필요한 최소인원인 3명의 위원이 남아있기에 재판부가 구성될 수 있었다. 그 재판부가 절차에 따라 판정을 내렸기 때문에 판정 결과에는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

일본은 "WTO 회원국 사이에서도 타당성을 문제 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며 국제 여론이 자신들의 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미국등 강대국이 주장하는 WTO 무용론에 올라타 판정 결과에 트집을 잡으려는 모양새로 비춰질 수 밖에 없다. 후쿠시마산 수산물 분쟁이 아닌 WTO 분쟁해결기능 전체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교묘하게 프레임을 바꿔 여론몰이에 나서고 있는 셈이다.


우리 정부로선 후쿠시마 수산물 관련 분쟁에서 극적인 최종 승소로 웃었지만, 일본이 WTO 개혁 압박에 나선 이상 이를 손놓고 바라볼 수 만은 없게 됐다. WTO 체제는 신흥국 한국이 선진국 시장에 쉽게 안착할 수 있게 해 수출 주도 성장을 뒷받침했다. 최근 거세진 보호무역주의 공세를 견디기 위해서라도 WTO의 기능 회복은 중요하다. 보다 적극적으로 WTO 개혁 논의에 참여해 국제 무역질서 재정립 과정에 우리 목소리를 반영해야 하는 이유다. 일본은 지난해 기준 WTO 분담금 4위 국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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