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언맨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11년

임현경 ize 기자 2019.05.02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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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시작한 자(The man who started it all).”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두고 마블 스튜디오의 대표인 케빈 파이기가 한 말이다.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아이언맨을 맡은 그는 2008년 첫 등장 이래 2019년 하나의 거대한 게임을 끝낼 때까지 11년 동안 MCU를 이끌어왔다.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새로운 영웅들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그를 떠나보내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아이언맨으로서 존재했던 지난 11년을 돌아봤다.

아이언맨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11년


‘어벤져스 : 엔드게임’을 비롯한 MCU 영화의 내용이 있습니다.

“I am Iron Man”
“나는 아이언맨이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이 한마디는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MCU 전체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2008년 ‘아이언맨’이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말 그대로 ‘바닥을 쳤다’. 그가 “애정 표현이라고는 함께 마약을 하는 것밖에는 몰랐던(‘The New Breed: Actors Coming of Age’)” 아버지에게 마약을 건네 받았을 때의 나이는 만 6세였고, 이후 그는 심각한 중독에 빠져 살았다. 마약 복용으로 복역 이후에도 끊임없이 마약에 손대다가 드라마와 연극에서 퇴출당했고, 외도를 일삼았으며, 2005년엔 “좋아 보인다” 인사를 건넨 여성 인터뷰어에게 “당신 가슴도 좋아 보인다”라고 성희롱을 범했다. 연기 천재이자 구제불능 문제아였던 그가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방황하던 토니 스타크가 된 것은 필연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치즈버거의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 일을 계기로 마약을 완전히 끊은 그는 무기 생산 중단을 결심한 토니 스타크가 처음으로 먹는 음식을 치즈버거로 설정했다. 정체를 숨기는 코믹스 내용과 달리, 기자회견장에서 스스로 ‘아이언맨’임을 밝히는 장면 역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아이디어였다. 제작진은 토니 스타크의 성격상 주어진 대본을 그대로 읽을 리 없다는 판단 하에 그의 애드리브를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로 사용했다. ‘아이언맨’은 전 세계 팬들을 사로잡으며 5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거둬 들였고, MCU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어벤져스의 구심점
MCU의 유일한 히어로였던 아이언맨은 동료를 만나 또 다른 가족을 이뤘다. ‘아이언맨 2’에서 힘의 원천이자 목숨을 지켜주는 아크 리액터가 동시에 수명을 좀먹는다는 것을 알게 된 토니 스타크는 절망에 빠졌지만,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안전한 아크 리액터 개발에 성공했다. ‘어벤져스’에서는 특유의 빈정거리는 말투와 자만심으로 동료들과 갈등을 빚다가도 결국 모두를 결집시키고 작전을 주도했다. 폐허가 된 가게에 둘러앉아 다 같이 슈와마를 먹는 쿠키 영상은 아이언맨이 웜홀에서 빠져나와 지쳐 쓰러진 와중에도 “슈와마를 먹으러 가자”라고 말한 데서 비롯됐다. 슈와마(밀전병에 고기와 채소를 싸먹는 음식의 일종) 역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애드리브였다. 그는 실제로 동료들을 각별히 챙겼고 MCU의 개국공신으로서 자신의 영향력을 적극 이용했다. 동료 배우들이 마블 영화 출연을 고민할 때면 적극적으로 설득했고, 마블에 “동료들이 대우받지 못하는 곳에선 일할 수 없다”라고 말하며 보다 좋은 조건의 계약을 이끌어냈다. 한 관계자가 ‘Deadline’에 전한 말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그들에게 얼마나 든든한 아군이 되어줬는지를 보여준다. “마블을 대하는 나에겐 4개의 단어가 있다. ‘엿 먹어, 로버트 불러(F**k you, call Robert).’”캐릭터와 배우의 인기는 날이 갈수록 상승했고, 코믹스에 비해 대폭 커진 아이언맨의 영향력은 곧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마블에 행사할 수 있는 힘이 됐다.

정비공이 할 일
‘아이언맨 3’에서 토니 스타크는 과거의 자신이 만들어낸 악마와 마주한다. 오만한 행동으로 상처를 줬던 과학자가 그의 목숨을 위협하는 테러리스트로 변해버린 것.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역시 과오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2014년 아들 인디오 팔코너 다우니가 마약 중독에 빠져 재활원에 들어가는 걸 지켜봐야 했다. 같은 해 케임브리지 대학교 강연에서는 “스칼렛 요한슨만 어벤져스 중 유일하게 단독 영화가 없다. 당신들은 스스로 페미니스트라 할 수 있나?”라는 질문에 “다 허상”이라고 대답했다가 언론의 비판을 받았다. 그는 ‘허상’을 언급한 이후 “이런 장르의 영화에는 아직 서구 중심적인, 여성혐오적인 것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지금은 ‘실재하는 일’들이 있다”라며 반전을 꾀했지만, 성희롱 전적과 함께 앞부분만이 알려지면서 비판의 대상이 됐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해결책은 영화 속 아이언맨이 위기를 극복한 방법과 비슷했다. ‘아이언맨 3’에서 춥고 척박한 곳에 홀로 떨어진 토니 스타크는 어린 날의 자신이자 다음 세대인 소년을 만나 ‘mechanic’(정비공)으로서의 자아를 깨달았다. 정비공의 일은 고장난 것들을 고치는 것이었기에, 그는 망가진 로봇부터 자신의 잘못으로 생겨난 문제들까지 제 손으로 바로잡았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도 서툴지만 조금씩 자신의 현재를 고쳐나갔다. 아들의 재활을 위해 노력했고, ‘아이언맨 3’에서 페퍼 포츠(기네스 펠트로)가 이전 시리즈보다 더 많은 액션을 펼칠 수 있도록 추진했다. “이런 장르의 영화에서 여성들은 ‘어머나, 뭔가 일어나고 있네. 물러나 있거나 바로 여기서 휩쓸려야지’ 식으로 그려진다. 정말? 우리가 21세기에 살고 있는 게 맞는 건가?(‘Comicbookmovie.com’)”라면서.



새 세대를 위한 준비
“마블의 새로운 세대를 위한 준비(Get ready for a new generation of Marvel)”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2016년 자신의 트위터에 마블 코믹스의 차세대 아이언맨 포스터를 올리며 이같이 말했다. 그의 외형과 흡사한 백인 남성 앞에는 흑인 소녀 릴리 윌리엄스가 당당한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인종, 성별, 나이 모든 면에서 대척점에 서 있는 듯한 두 사람은 마블이 앞둔 세대 교체의 상징과 같았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게시물은 ‘아이언맨이 차기 아이언맨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보도로 이어졌고, 코믹스의 변화가 MCU에 반영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새 아이언맨을 소개하는 동안, 토니 스타크는 새로운 영웅들이 탄생할 수 있는 기틀을 닦았다.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비전은 토니 스타크가 개발한 운영 체제 자비스를 토대로 했지만 그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존재했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워’에서는 블랙팬서와 스파이더맨을 어벤져스로 불러들였다. 심지어 ‘스파이더맨: 홈커밍’에서의 토니 스타크는 아버지 또는 선생님 역할을 자처했다. 그는 피터 파커가 진정한 스파이더맨이 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영웅으로서 올바른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했다. “수트 없인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면 더더욱 수트를 가져선 안 된다”라는 가르침은 그가 ‘아이언맨’ 트릴로지를 통해 깨달은 교훈이었다. 어느덧 피터 파커는 자기만의 정체성을 찾게 되고, 아이언맨 같은 유명인사가 되는 것을 마다하고 ‘다정한 이웃’으로 남기를 택할 만큼 훌쩍 커버렸다. 새 세대를 위한 준비를 모두 마친 셈이었다.

그가 작별하는 법
이변이 없는 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아이언맨은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끝으로 MCU에 등장하지 않을 예정이다. 마블은 ‘아이언맨'부터 ‘엔드게임'까지를 ‘인피니티 사가(The Infinity Saga)’로 명명하고 대서사의 막을 내렸으며, 앞으로는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라고 예고했다. 이별을 목전에 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자신의 성과를내세우거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대신 한걸음 물러나기를 택했다. 특히 눈에 띄었던 건 새 히어로를 향한 응원과 지지였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브리 라슨 같은 대스타의 옆에 앉게 되어 영광이다”라며 ‘캡틴 마블’로 새롭게 어벤져스에 합류한 그를 치켜세웠고, 취재진 앞에 섰을 때에도 그에게 중앙 자리를 양보했다. “타노스는 겁먹어야 할것”이라는 브리 라슨의 말에 “그는 정말 겁먹어야 해!”라며 통쾌해하기도 했다. “11년 전엔 나를 위해서 뭔가를 하려고 했는데, 지금은 이런 문화적 현상이나 순간을 겪을 수 있어서 영광이다.” 그가 지난 4월 15일 내한했을 당시 MCU의 일부이자 전체로서 존재했던 시간을 갈무리하며 한 말이었다. 아이언맨으로서는 마지막 방문이었을 이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팬들을 향해 “2008년 이곳에 처음 왔을 땐 저도 여러분도 어리고 젊었을 텐데, 모두 잘 자라서 자랑스럽고 행복하다”라는 작별 인사를 건넸다. 굿바이, 아이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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