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없이 기업 없다"…100년 전 민족기업의 투혼

머니투데이 LA·샌프란시스코(미국)= 이재원 ,상하이·충칭(중국)=이건희 정진우 2019.04.10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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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300][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나라를 세운 기업]-②'민족자본' 말살정책 아래서도 성장…독립운동 혈관으로

편집자주 1919년 4월10일.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의정원(현 국회)이 개원했고, 하루 뒤인 11일 임시정부가 설립됐다.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겠다”는 민족의 염원이 담긴 이곳은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가는 시작점이었다. 같은해 3.1운동을 비롯해 임정을 중심으로한 독립운동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이때 민족기업들이 나섰다. 이들 기업 창업주는 사재를 털어 독립 자금을 댓고, 기업의 이윤을 나라 구하는데 썼다. 머니투데이는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 설립 100주년을 맞아 당시 민족기업의 자취를 취재했다. 이들 기업이 100년 후 지금 기업에게 남긴 메시지를 5회에 걸쳐 보도한다.

"나라 없이 기업 없다"…100년 전 민족기업의 투혼


100년 전 일제 치하의 조선은 조선총독부가 헌병 경찰을 앞세워 조선의 주권을 약탈하던 이른바 '무단 통치기'였다. 총독부는 산림령, 임야조사령, 어업령, 광업령으로 자원 개발권을 독점했다. 토지 수탈을 위한 '토지조사사업'도 진행됐다. 총독부의 주도로 간선철도, 항만시설 정비가 이뤄졌다. 일각에선 '근대화'의 계기가 됐다고 하지만, 실상은 조선에서 일본으로의 자본 유출을 위한 전제작업이었다.

회사를 창업하는 것 역시 조선총독부의 허가가 있어야 가능(회사령)했다. 일본 기업의 성장을 돕고, 조선의 민족기업을 억압하기 위한 총독부의 획책이었다. 식민지 조선에 시장경제를 이식해 일본 상품의 판매를위한 시장으로 바꿔나갔다. 조선을 일본 상품의 생산기지이자 내수 시장으로 만드려는 계획이 추진됐다.



◇민족자본의 성장, 독립운동의 씨앗= 이같은 억압 속에서도 민족자본은 성장했다. 일제가 통치를 위해 마련한 것이지만, 본격적으로 도입되는 시장경제 체제는 민족기업에 기회가 됐다. 경영하는 방식도 이전과 달랐다. 입소문과 보부상에 의존하던 선전도 일간지 광고로 바뀌었다. 상품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기업 가치, 비전 등을 담아냈다.

상품권 분쟁도 여기저기서 벌어졌다. 이를 방어하기 위해 실제 생산하지는 않지만 상품권 등록을 하는 '방어용 상품권'을 등록하는 기업도 많았다. 오늘날의 기업활동과 별반 다르지 않다. 회사를 주식회사로 전환해 외부 자금을 수혈하는 기업공개(IPO)도 활발하게 이뤄졌다.



'조선의 벤처 기업가'들이 벌어들인 민족자본은 독립운동의 핏줄이 됐다. 특히 1919년 상해 임시정부의 수립은 이 민족기업들이 마련한 독립자금 없이는 어려웠다는 평가다. 나라의 존망이 달린 상황에서 기업들은 앞을 다투어 자금을 지원했다. 여차하면 기업을 독립운동 조직으로 전환하려는 기업인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하는 기업들도, 역사 속으로 스러져간 기업도 많다.

2019년 현재, 임직원들이 자사의 독립운동 참여 사실을 알지 못하는 기업들도 상당하다.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는 기업들도 많다. 문제는 자료조차 거의 남아있지 않은 현실이다. 신주백 한림대 교수는 "긴박하고 비밀스럽게 돌아가는 독립운동 자금 지원을 하며 증거 자료를 남기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라 없이 기업 없다"…100년 전 민족기업의 투혼
◇나라를 세운 기업들= 1919년 무렵 서울에선 '생명을 살리는 물'로 불린 '활명수'(活命水)가 독립운동의 주요 자금줄이 됐다. 활명수는 1897년 민병호와 그의 아들 민강이 창업한 동화약방(현 동화약품)의 간판 상품이다. 국내 최초 제약기업에서 만들어낸 최초의 양약이라는 타이틀도 있다. 서슬퍼런 일제의 지배 하에서도 큰 인기를 끌며 성장한 동화약방은 상해 임시정부 수립 직후엔 국내 독립운동의 전진기지 역활을 톡톡히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비밀연락망인 '서울연통부'가 동화약방이었다.


영남에선 백산 안희제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한 기업들이 있었다. 해방 후 사업 동반자가 된 GS 창업주 허만정과 LG 창업주 구인회가 그들이다. 먼저 허만정이 1914년 주주들의 자본금으로 세워진 백산상회에 주주로 참여했다. 백산상회는 쌀과 옷감, 생선 등을 취급하는 오늘날의 '슈퍼마켓'이었다. 이렇게 마련한 자금은 모두 상해 임시정부로 흘러갔다. 자금의 운반까지도 백산상회에서 맡았다. 백산상회 출신의 윤현진은 독립자금을 상해로 운반하는 '전달책'으로 활약했다.

LG그룹 창업주 구인회는 1931년부터 경남 진주에서 포목점 구인상회를 운영했다. 1942년 구인회를 만난 안희제는 당시 1만원(쌀 500가마니 값)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임시정부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수 년 간의 피난생활을 한 뒤 충칭에 자리잡은 때였다. 구인회는 선뜻 거액을 내놓았고, 이 역시 충칭 임시정부의 중요한 자금원이 됐다. 독립운동의 끈으로도 이어져 있던 구인회와 허만정은 광복 후 다시 만나 사업 동반자가 됐다.

중국 현지 기업으로 독립운동에 나선 이도 있었다. 신용호 교보생명 창업주는 1940년 중국 베이징에 곡물 유통업을 하는 북일공사를 세웠다. 이때 얻은 수익은 자연스레 독립운동 자금으로 흘러갔다. 신용호는 저항시인 이육사와도 교류하며 독립운동 정신도 강화했다. 이는 교보생명 설립 이념인 '국민교육진흥'과 '민족자본형성'의 배경이 됐다.

당시 민족자본으로 국내에서 국민들이 자금 확보에 어려움을 갖지 않도록 역할을 한 곳도 있다. 대한천일은행(현 우리은행)은 1899년 세워진 뒤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상황에서 민족은행 역할을 수행했다. 고종 황제가 창립자금의 절반 이상을 지원하고, 상인층이 중심이 된 은행으로 국내 상인들에게 저리 자금 지원 등 일본 금융자본에 맞서는 역할을 맡았다.

창업주의 독립정신이 이후 독립운동을 기억하는 움직임으로 이어진 기업도 있다. 효성그룹은 창업주 조홍제의 애국 정신을 바탕으로 2007년부터 독립운동 흔적 지키기에 나섰다. 조홍제는 1926년 6.10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옥살이를 했고, 광복 당시 아들에게 소수에만 알려졌던 애국가를 가르친 인물이었다. 이후 효성은 1990년대 후반 첫 해외 생산기지로 자리잡은 중국 저장성시에서 독립운동의 흔적을 지키는 활동을 진행했다. 2007년 한중수교 15주년을 맞아 중국 저장성 자싱시(가흥시)에 있는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 피난처 보존 사업을 진행한 것이다.

이 피난처는 1932년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 의거 후 상하이를 떠나 충칭에 닿기까지 피난생활을 하던 임시정부 요인들이 머문 곳이었다. 관광객 발길이 적은 도시였던 만큼 2006년이 돼서야 중국 정부는 이곳에 기념관을 세웠다. 이후 효성이 직접 현장 관리를 맡으며 여러 차례 수천만원이 넘는 돈을 들여 전시관을 개·보수 중이다.

미주에서는 유한양행 창업자인 유일한 박사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1926년부터 사업을 시작한 유 박사는 한국인들의 건강을 위해 품질 좋은 결핵약과 소염진통제 등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며 보건애국에 힘썼다. 물론 판매 대금은 독립운동 자금으로 여러 차례 지원됐다.

1930년대 후반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경영에서는 잠시 손을 뗐지만, 현지에서 재미 한인 독립군 '한인국방경위대' 창설에 앞장섰다. 아직도 LA 시내 중심부를 지키고 있는 시청사 한 복판에서 캘리포니아 주지사, LA 시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식이 이뤄졌다.

당시 시작된 LA 시청사 태극기 계양식은 아직도 광복절이나 미주 한인의 날 행사 등에서 이뤄지며 당시의 독립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유 박사는 이후에도 직접 미군 특수부대 OSS(미국 전략정보처)에서 훈련을 받으며 조선 침투 작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 작전을 위해 유한양행 본사는 물론 전국 조직을 독립운동 조직으로 전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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