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도 이공계 대학원 미달…"4차산업 뿌리 말라간다"

머니투데이 류준영 기자 2019.03.1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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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진학기피, 기업·대학 인력수급 불일치…中·日 앞서가는데 韓 설익은 대책만

서울대도 이공계 대학원 미달…"4차산업 뿌리 말라간다"


“우리 예서 꼭 서울 공대 보내야해요.”

최근 종영한 드라마 ‘스카이(SKY) 캐슬’, 극중 딸(예서)의 대학 입시에 혈안인 엄마 한서진 대사에서 ‘의대’를 ‘공대’로 바꿔봤다. 왠지 어색하다. 십중팔구 시청자 반응도 “뭐, 공대?”라며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크게 공감을 얻지 못하는 이유를 현실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2018학년도 서울대 이공계 대학원 석사·박사·석박사 통합 과정 모두 ‘정원 미달’ 사태를 빚었다. 수년간 경쟁률 하락 추세가 이어졌지만 ‘동시 미달’은 서울대 개교 이후 처음. 수도권 일반대, 지방대학 사정도 나을 게 없다. 오죽하면 “중국과 베트남, 몽골서 온 유학생 한 명이 아쉽다”는 푸념도 나온다. 이공계 대학에 이은 도미노로 이공계 대학원 기피 현상도 뚜렷해지고 있다.



그런 사이 반도체·자동차·선박 업황 둔화 등으로 경기 지표 곳곳엔 빨간불이 켜졌다. 인공지능(AI), 빅데이터, 클라우드, AR·VR(증강·가상현실), 스마트공장, 블록체인, 자율주행차, 드론(무인기) 등 4차 산업혁명 관련 미래 먹거리로 탈출구를 찾으려는 우리 기업들은 “사람이 없다”며 발을 동동 구른다.

◇대학·출연연·기업연 연구인력 구멍 ‘숭숭’=“개발해야 할 기술은 넘치고, 더 큰 시장과 성장 가능성도 충분해 보인다. 하지만 정작 새 무대를 뛸 주전급 기량을 갖춘 플레이어(연구자)가 안 보인다.” 4차 산업혁명을 주제로 한 포럼에 참여한 상당수 전문가들의 공통된 인식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하 과기정통부)와 ICT(정보통신기술) 업계에 따르면 AI, 빅데이터, AR·VR 등 4차 산업혁명 대응 8대 핵심 선도사업이 인재 수급에 애로를 겪고 있다.

소프트웨어(SW)정책연구소에 따르면 2022년까지 AI 개발인력이 1만명 가량 부족할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고용정보원은 2026년까지 바이오·자연·공학·관련 8만명의 인재부족을 예상했다. 이공계 대학원 선호도와 진학률이 계속 낮아지면서 이런 고민은 한층 더 깊어진다.

과기정통부가 조사한 이공계 대학원 충원율은 2014년 83.3%에서 2015년(82.9%), 2016년(81.3%), 2017년(78.3%), 2018년(76.0%)까지 매년 1~3%포인트씩 감소 추세다. 대학 한 관계자는 “일부 지역 대학연구실의 경우 대학원생의 50% 이상이 유학생으로 채워질 정도”라며 이공계 기피현상이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현상의 원인 중 하나는 신진 연구자의 취업난 심화다. 과기정통부에 따르면 직장 병행자를 제외한 학업 전념 신규 박사의 취업률은 66.5%에 불과하다. 따라서 다른 분야로 하향 취업하거나 정규직 대비 50~70% 임금을 받는 비정규직 신분으로 연구를 이어가는 고용 불안정이 나타난다.

분야별 인력수급 불일치도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기업은 연구 비중이 높은 ICT 중심으로 연구인력 수요가 높은데, 대학은 바이오 분야 석박사 배출이 많아 엇박자를 낸다. 과기정통부에 따르면 기업연구비중은 ICT(51.7%), 기계(20.6%), 화학(10.6%), 재료(5.8%), 바이오(5.2%) 순인데 석박사 졸업생 규모는 바이오(25.7%), ICT(15.7%), 건설교통(9.8%), 화학(7.8%), 기계(5.9%) 순이다.

교수·학생 간 신뢰할 수 없는 연구실 문화도 원인 중 하나라는 지적이다. 학생 인건비 착취 등 이른바 ‘교수 갑질 사태’가 불거지면서 대학원 입학 상담을 하러 온 학부생 대부분은 “얼마 줄 수 있나?”라고 묻는 경우가 많다. 예전에는 연구 분야에 대한 관심과 전망을 두고 판단했다면 지금은 ‘인건비’가 중요한 선택 기준인 된 셈. 서울대 한 교수는 “대학원생들이 실질인건비 등으로 교수를 비교·평가하는 인터넷 사이트도 등장했다”며 고개를 저었다.

과학기술 분야 25개 정부출연연구기관(이하 출연연)도 전문인력 기근에 시달리지만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출연연을 직급별로 살펴보면 책임급(46%), 선임급(37%), 원급(11%), 기타(6%) 순이다. 역삼각형 인력구조다. 이 상황에서 책임급 인력들의 퇴직이 본격화되면 연구역량 급감과 국가 R&D 사업 차질이 불가피하다. 지난해 25개 출연연의 비정규직 연구자 2100여명이 정규직으로 전환되면서 앞으로 신규 박사급 연구자 채용도 힘든 상황이다. 이장재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혁신전략연구소장은 “현재 출연연에선 고령화 대비, 인력 선순환 체계, 체계적인 기존 역량 전수 시스템 등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고 진단했다.

국내 3만8700여개(2017년 기준) 기업연구소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에 따르면 대기업을 제외한 중소·벤처기업당 연구원 수는 평균 9명(2016년 기준)으로 2005년 20명에 비해 절반 이상 줄었다. 협회 관계자는 “국내외 경영환경 변화로 어려움을 겪는 중소·중견 기업들이 늘면서 연구인력 고용은 더 악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AI석사·아카데미 개설 日·中 잰걸음…韓 설익은 대책=지난해 일본 요코하마시립대학은 데이터 사이언스학과를, 규슈 공업대학은 정보공학과에 AI코스를 개설·운영중이다. 명문 사립대 릿쿄대학은 AI 전문대학원 AI과학연구과(석사 과정)를 개설할 예정이다.

정보통신기획평가원(IITP)에 따르면 일본 정부 차원에서 ‘신산업구조비전’ 정책을 통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요구되는 인재상을 도출, 종합 지원책을 마련해 추진하고 있다. 중국 포털사이트 바이두는 AI 인재 10만명 양성을 목표로 ‘윈즈 아카데미’를 개설·운영하는 등 민간차원에서도 특화된 전문인력 양성에 공을 들이고 있다.

우리도 부랴부랴 지난 7일 부처별 올해 업무계획을 통해 4차 산업혁명 인재 육성안을 내놨다. 하지만 효과는 미지수다. 실습 교육 중심으로 SW 인재를 양성하는 이노베이션 아카데미와 함께 AI대학원, 융합보안대학원을 각각 3개씩 신설한다는 실행안이 담겼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대학별 ‘나눠먹기식’ 또는 ‘물타기식’ 사업으로 변질될 수 있다”며 우려했다. 이공계 대학원 학생연구자를 늘리기 위해 안정적 생활비를 지급하는 ‘학생맞춤형 장려금 포트폴리오’도 도입한다. 하지만 이는 재원 마련 방안이 논의되지 않아 시행까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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