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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그런 거 하나도 못 합니까?"

머니투데이 뉴욕(미국)=이상배 특파원 2019.02.25 0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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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배의 이슈 인사이트] 김정은과 달리 자국 의회도 만족시켜야 하는 트럼프…'평화의 윈셋(승리조합)' 찾길

"대통령이 그런 거 하나도 못 합니까?"




2007년 10월3일 오후 2시45분, 평양 백화원 영빈관.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마주 앉았다. 회담 시작과 동시에 김 위원장이 돌발 제안을 던졌다.

"기상이 좋지 않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오늘 일정을 내일로 미루고, 내일 오찬을 편안하게 앉아서 허리띠 풀어놓고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하루 일정을 늦춰 모레 아침에 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순간 당황한 노 대통령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즉답을 피했다. "나보다 더 센 권력이 두 군데가 있는데, 경호와 의전 쪽과 상의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김 위원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대통령께서 그거 하나 결심 못하십니까. 대통령이 결심하시면 되지 않나요."



노 대통령은 "큰 것은 제가 결정하지만, 작은 일은 제가 결정하지 못한다"며 회담장 밖 참모들에게 검토를 지시했다. 서울과 평양의 참모들 사이에 방북 연장 여부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상황은 2시간 뒤 자연스레 정리됐다. 김 위원장이 스스로 제안을 거뒀다. 김 위원장은 "충분히 대화를 나눴으니 (연장을) 안 해도 되겠다"며 "남측에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 본래대로 하자"고 했다.

독재국가와 민주국가의 협상이 그렇다. 독재국가에선 지도자 한명이 결단하면 끝이지만, 민주국가는 그렇지 않다. 행정부 내에도 반대파가 있을 수 있다.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그들을 설득하지 않으면 결정의 정당성을 잃는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멘토였던 리차드 뉴스타트 전 컬럼비아대 교수는 "대통령의 권력은 설득에서 나온다"고 했다.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도 마찬가지다. 김 위원장은 스스로 결정하면 그걸로 족하다. 최근 대미·대남 대화에 반대하는 정적들을 대거 숙청까지 했다고 하지 않나.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다르다. 국민과 의회, 심지어 행정부 내 반대파들의 의견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기자들과 만나 "대북 경제제재를 풀어주고 싶지만, 북한도 뭔가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북한의 실질적 행동이 없으면 반대파들을 설득할 수 없다는 얘기다.

정치중립적 싱크탱크 '시카고 국제문제협의회'의 최근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민의 73%가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북한이 핵을 완전히 포기할 것이란 응답은 단 3%에 그쳤다. 오차범위를 고려하면 사실상 0%와 다를 바 없다.

미 의회의 분위기도 비슷하다.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민주당)은 최근 미국을 방문한 문희상 국회의장 등 국회대표단의 면전에서 "나는 북한을 믿지 않는다"며 "북한의 진짜 의도는 비핵화가 아니라 남한의 무장해제"라고 잘라말했다. 북한에 대한 미 의회의 뿌리깊은 불신을 방증한다.


미 행정부 내에서도 상당수가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 행보를 우려하고 있다. 미국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미 행정부에서 북미 정상회담의 성과를 낙관하는 사람은 트럼프 대통령 뿐"이라고 보도했다. 심지어 대북협상을 주도하는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도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술책에 당해 너무 많은 걸 내줄 것을 우려했다고 한다.

게임이론에 따르면 민주국가 간 협상은 '양면게임'(Two-Level Game) 방식을 따른다. 국가 간 협상, 그리고 행정부와 의회 간 국내 협상. 이 2가지가 동시에 이뤄진다는 뜻이다. 설령 국가 지도자 사이에 합의가 이뤄졌더라도 자국 의회에서 비준을 못 받으면 소용이 없다. 결국 상대 국가와 자국 의회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승리조합'(win-set·윈셋)을 찾는 게 민주국가 협상의 본질이다. 부디 하노이에서 두 정상이 그런 '평화의 윈셋'을 찾아주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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