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몰랐던 법원①] 법원에는 '억울함을 들어주는 자원봉사자'도 있다

머니투데이 안채원 인턴 기자 2019.02.12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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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12년째 법원에서 자원봉사하는 김애자씨 "질문하다 화 내는 분들도···법원이 좀 더 따뜻한 공간 됐으면"

편집자주 첫 기자 생활을 법원에서 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딱딱하게만 느껴졌던 법원에도 따뜻한 순간들이 있다는 걸 몸소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고', '구속'과 같은 단어로 점철된 기사가 아닌 '사람 냄새' 나는 법원 기사를 꼭 써보고 싶었습니다.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 6번 출입구에 위치한 시민 자원봉사자 민원안내 창구./사진=안채원 인턴기자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 6번 출입구에 위치한 시민 자원봉사자 민원안내 창구./사진=안채원 인턴기자


법원에는 언제나 '헤매는 사람들'이 많다. 낯선 업무를 보기 위해 생전 처음 법원을 찾은 이들의 얼굴엔 긴장감이 맴돈다. 서울고등법원에는 이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길잡이가 돼 주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자원봉사자'들이다. 서울고법에는 현재 총 10명의 자원봉사자가 있다. 법원 내부에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해주고 민원을 해결해주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다.



12년째 서울고법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김애자씨(63)는 그중 한 명이다. 법원에서 자원봉사자에게 제공하는 건 '구내식당 식권' 뿐이다. 그럼에도 김씨는 "봉사를 하면서 힘이 들진 않냐"는 기자의 질문에 "사람들이 나를 많이 찾아 힘이 들면 들수록, 내가 이곳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더운 날엔 시원한 차 한 잔을, 추운 날엔 따뜻한 차 한 잔을 내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김씨에게 법원은 삶의 보람을 주는 공간이다. 그녀의 이야기를 '일문일답' 형식으로 담아봤다.

서울고등법원에서 12년째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김애자씨./사진=안채원 인턴기자서울고등법원에서 12년째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김애자씨./사진=안채원 인턴기자


-처음에 어떻게 법원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하게 되셨나요

"저는 2002년부터 서울시 자원봉사자로 활동했어요. 경력이 좀 있죠(웃음). 그러다가 2007년에 서울고법에서 1기 자원봉사자를 모집한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법원'이라는 곳이 굉장히 중요한 곳이잖아요. 중요한 국가기관에서 내가 대민봉사를 해보는 것도 참 보람되고 내 인생에 새로운 경험이 되겠다 싶어서 자원했어요. 그러니까 이제 벌써 법원 봉사를 한 지 12년째네요"

-자원봉사를 정말 오랜 시간 하셨는데, 가장 큰 이유가 뭘까요


"저는 원래 전업주부였습니다. 남편 내조하고, 애들 교육시키는 게 인생의 전부였어요. 아이들이 대학을 가고 나니까 마음이 허하더라고요. 그동안 내 가족과 가정을 위해서만 살았다면 이제는 뭔가 좀 달라지고 싶은 마음이랄까? 아이들과 남편에게 쏟았던 시간만큼을 앞으로는 내가 속해있는 사회와 나라를 위해서 쏟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좀 달라지셨나요?

"많이요. 삶이 더 활기차졌어요. 주부로서 내 가족만 위해서 살다가 내 이웃에게 나의 정성과 도움이 쓰여진다고 생각하니 보람찹니다. 가끔 제게 뭘 물어보신 다음에 답을 얻고 나면 감사하다면서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아주시는 분들도 계세요. 별거 아니지만 그럴 때 참 뿌듯해요"

-그래도 힘든 점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가끔 뭘 물어보시다가 화를 내는 분들이 계세요. 제 답변이 충분치 않다는 이유로요. 재판 결과를 지켜보고 난 뒤엔 저를 붙잡고 본인이 억울하다는 하소연을 한 시간 동안 늘어놓는 분들도 계세요. 그런데 저는 그럴 때마다 오히려 '내가 정말 여기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렇게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안 그런가요?"

-관련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꼽자면요

"작년 같은 경우엔 법원이 정말 혼란스러웠죠. 박근혜 전 대통령 재판이 있었을 땐 보수 성향 단체 회원분들이 자주 오셔서 제게 '정말 억울한 결과가 아니냐' 호소하기도 하셨어요. 무엇이 옳고 그르냐를 떠나, 매일 시끄러울 수밖에 없는 법원의 상황이 저도 많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대응하시나요

"항상 답은 '공감'이더라고요. 제가 무슨 답을 드리는 게 아니라 그냥 끄덕이고 들어주는 거요. 이런 것만 해도 같이 살아가는 한 국민으로서 공감대가 형성되니까. 그분들도 본인들의 분함과 억울함을 다 토해내고 나면 뭔가 풀린 얼굴로 돌아가세요"

-법원 자원봉사자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 같은 게 있을까요?

"신임 고등법원장이 오시면 저희를 한 번씩 모아서 밥을 사주세요. 전통 같은 거죠. 뭐 불편한 점은 없으시냐,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 그런 말씀 하시고요. 자원봉사자들에게 인사도 직접 하시고 고마움도 전달하는 그런 자리인 것 같아요. 자리 만들어주시는 게 참 감사하더라고요. 저희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지나칠 수 있는 건데 한명 한명 따로 인사할 수 있는 거니까요"

김애자씨가 2007년 박송하 전 서울고법원장에게 자원봉사자 임명장을 받고 있다. 박 전 고법원장은 자원봉사자 한 명 한 명에게 직접 임명장을 수여했다고 한다./사진=김애자씨 제공김애자씨가 2007년 박송하 전 서울고법원장에게 자원봉사자 임명장을 받고 있다. 박 전 고법원장은 자원봉사자 한 명 한 명에게 직접 임명장을 수여했다고 한다./사진=김애자씨 제공
-가장 기억에 남는 법원장님이 있으신가요

"박송하 전 고법원장님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아무래도 제가 처음 와서 만난 분이다보니. 법원장이 자원봉사자들에게 밥을 사는 전통을 처음 만드신 분이기도 하시고요. 요즘엔 안 그러는데 법원장님이 자리를 따로 마련해서 직접 임명장을 주기도 하고 저희와 함께 단체 사진을 찍기도 하셨어요"

-법원이 이것만큼은 개선했으면 좋겠다 싶은 점 한 가지만 말해주세요

"분위기가 좀 더 부드러워졌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너무 경직된 분위기인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법원을 찾은 사람들도 같이 경직되는 것 같고요. 법원의 삭막함을 덜어내고 좀 즐거운 분위기가 됐으면 좋겠어요. 결국 법원이라는 게 내가 최후로 보호받는 곳, 나를 지킬 수 있는 곳 아닌가요? 그걸 느낄 수 있는 따뜻한 분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법원에서 자원봉사를 하실 계획이세요?

"네 지금의 생각으로는요(웃음). 저 멀리서 걸어오는 사람을 보면 목이 마른지, 추운지 딱 보이거든요. 그럼 제가 가지고 있는 따뜻한 차를 내주기도 해요. 마음이 경직된 사람들에게 차 한 잔 내주는 일이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인가요? 앞으로도 그런 작은 역할을 하면서 보람을 느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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