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아무래도 우리는 배꼽을 나누어 가진 사이

머니투데이 김정수 시인 2019.01.26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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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이은 시인 ‘우리 허들링할까요’

[시인의 집] 아무래도 우리는 배꼽을 나누어 가진 사이


2006년 ‘시와시학’으로 등단한 이은(1957~ )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우리 허들링할까요’는 우리 시대(사회)의 여성이 어떤 고통을 당하고, 상처를 받으며 살아가는지를 고백하듯 보여준다. 남아선호사상이 강한 가부장적 집안의 여성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혹독하게 경험한 차별과 폭력으로 자아는 철저히 파편화된다.

불행은 여성 개인에게 한정되지 않고 가정으로 확산한다. 이는 한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모순이다. 시인은 개인, 더 나아가 가정에서의 차별과 폭력을 통해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와 삶의 본질을 건드리고 있다.



‘흘러내린다’라는 시어에 함축되어 있는 파편화된 내면은 주로 거울과 액자, 얼굴로 표출된다. 액자 “테두리 밖으로 얼굴이 흘러내렸다”(‘시인의 말’)거나 “구름을 잔뜩 껴입고 거울이 흘러내린다”(‘거울을 방 안에 내버려 두면 안 된다’)와 같은 문장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내 감정이 다 드러나는, 나를 대표하는 얼굴은 굴러가거나 무너지거나(‘얼굴의 바깥’), 눈·코·입·귀로 찢어져 해체되거나(‘물수제비’), 혹은 눈알을 뽑아 저잣거리에 던지는(‘눈동자를 꽃잎에 올려놓았을 때’) 등과 같은 자기혐오의 대상이 된다. 또한 시에 빈번히 등장하는 물과 불의 이미지는 생성과 소멸을 의미하고, 꽃과 새의 이미지는 사람과 사물을 이어주는 매개 역할과 감정을 이입하는 대상으로 작용한다.



물이 끓고 있었고
방 안은 수증기로 가득했고
저 하얀 물을 건너가려고

나는 얼굴 없는 시간 속에 깊숙이 잠겨있었고
그곳은 물의 집이었고

또 계집애야? 치워버려!


꿈인 듯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고
미세한 떨림, 미세한 숨결이 다리로 전해졌고

나도 모르게 나는
하나의 물방울로 까만 꽃씨로 하얀 꽃으로
물의 자궁을 떠다니는 익사체로 도망치기 시작했고

아득한 어느 시간의 밖에서
문득, 물의 기척을 느꼈고
물 위를 잠방잠방 건너오는 한 아이의 다리를 보았고
겁에 질린 아이의 늘어뜨린 팔을 보았고

문밖에서 누군가
아직도 살아 움직여
하는 소리를 들었고

나는 다시 물속을 이리저리 도망치기 시작했고
빽빽한 실핏줄의 그물에 뒤엉켰던 어느 꿈속처럼
물 위로 떠올랐고
허공에서 뜨거운 물이 확 쏟아졌고

- ‘태어나지 않은 집’ 전문


시 ‘태어나지 않은 집’의 화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여자아이의 입장, 즉 태아(신생아)의 시각에서 쓰였다. 방 안에선 아이를 씻길 물이 끓고 있는데, 엄마의 뱃속 양수 속에서 방 안의 따뜻한 물속으로 옮겨가려는 순간의 허공, “또 계집애야? 치워버려!”라는 살벌한 아버지의 폭언이 들려온다. 두 다리를 잡힌 신생아는 죽음의 공포에서 본능적으로 도망친다. “나도 모르게” “하나의 물방울”에서 “까만 꽃씨로”, 다시 “하얀 꽃으로” 변화를 거듭한다.

사람들의 관심 밖에서 사람의 몰골을 찾아가지만 각인된 공포로 인해 “물의 자궁을 떠다니는 익사체로 도망치기 시작”한다. 태어날 때부터 “겁에 질린” 아이는 포대기에 싸여 방 한쪽 구석에 한동안 방치된다. 문밖에서 들린 “아직도 살아 움직여”라는 구원의 말에 아이는 안도하기보다 또 도망친다. “빽빽한 실핏줄의 그물”로부터, 태어나기도 전에 뒤엉킨 삶으로부터 멀리 달아나려 애쓴다. 차라리 지금 상황이 현실이 아닌 꿈이었으면 하고 바랄 만큼 미래는 순탄치 않다.

아빠를 죽이고 싶어요 손목에서 흐르는 피의 색감으로
아빠의 얼굴을 그렸어요

선생님이 부모님을 학교로 소환한 날이었죠
짧은 치마를 입었다는 이유였지요
핏발이 오른 아빠가 너 죽을래 하고 면도칼을 내밀었어요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손목을 그었어요

동생은 이어폰을 끼고 열공 중이었고요 엄마는 넌 죽어도 싸! 입을 꾹 다물었지요
나는 피가 흐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어요

손목에서 선홍색 과육처럼 흘러내리는 피 달콤하고 선뜻한 감촉
아버지에게 복수하고 싶어요

친구는 아빠한테 골프채로 맞았다잖아요 그것보다 내 손으로 손목을 긋는 게
낫지 않을까요

반장이 칠판 구석에 ‘오늘의 할 일’이라고 썼죠 우리는 다 같이 이쁜 짓! 하고 외쳤죠
오늘은 이쁜 짓 하는 날

얼굴에서 손목이 돋아나왔어요 손목을 꺾어 화분에다 심을까요
보랏빛 나팔꽃 넝쿨손 내밀고 줄 타고 올라갈 수 있을까요
꿈은 멀어졌는데

우리 이쁜 짓 할래? 머리를 빗어내리면서
너 죽을래

- ‘이쁜 짓 할래’ 전문


태어나는 순간부터 버림받았던 아이는 학생이 되었다. 단지 “짧은 치마를 입었다는 이유”로 선생님은 아빠를 학교로 호출한다. 화가 난 아빠는 “너 죽을래” 하며 면도칼을 내민다. 이번에는 도망가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이 손목”을 긋는다. 단순히 사춘기의 반항이 아니라 죽음을 각오한 행동이다. 내가 자해를 하지 않았다면 친구처럼 “골프채로 맞았”을 것이므로 생존본능이라 할 수 있다.

누나(언니)가 자해를 했는데, 동생은 모른 척하고, 내 편이 되어줘야 할 “엄마는 넌 죽어도 싸!”라는 독설을 퍼붓는다. 애초에 엄마도 내 편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빠를 죽이고 싶”다 했지만 실상은 무관심과 폭언, 폭력을 휘두르는 가족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내가 죽어서라도 지옥 같은 삶을 마감하고 싶었던 것이다. 멀어진 꿈, 희망이 없는 삶에서 자살은 “이쁜 짓”일 수도 있다. “머리를 빗어내리면서” 농담처럼 건네는 “우리 이쁜 짓 할래?”는 마지막 행 “너 죽을래”에 비춰볼 때, “이쁜 짓”이라기보다 나쁜 짓을 내포하고 있다.

목련 나무 아래를 지나가면
희끗희끗 어른거리는 것 그 사람이 나무 그늘에 앉아
있는 것 같은

하얀 발목이 보이는 것 같은 복숭아뼈가 도드라진
사람의
발등이 보이는 것 같은

너무 환해서 그 아래에 가면 그늘이 없는 것 같은
그 사람이 세 들어 살던 목련 나무는
신발을 조등처럼 매달았다

객사한 아버지 누워계시고 관 위로 목련꽃 뚝뚝 떨어지고
그 나무 아래 지나갈 때면 하얀 신발 한 켤레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 같은

그 신발 속에서
꽃 사태 지고 꽃비 쏟아질 것 같은
봄날
자꾸 신발 뒤축이 목련 나무쪽으로 기운다

- ‘목련 신발’ 전문


시 ‘발바닥과 바닥 사이’에서 보면, 엄마가 “목을 매달고” 바로 새엄마를 들여 무소불위의 권력을 이어가던 아버지도 결국 객사한다. 하지만 죽은 “아버지의 안부는 내게 욕 같”(이하 ‘금기어를 찾아서’)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할 만큼 증오의 대상이다. 부계(父系)는 “본래 불의 집이었으므로” 모든 것(특히 여성)을 다 태워버리는 고약한 성질을 지녔고, 불의 집에서 태어나 죽어서도 “불의 집으로 들어”(이하 ‘불의 집’)간다. 그 불에 탄 “재를 뒤집어쓴 여인”들은 평생을 울부짖으며 산다.

시 ‘목련 신발’은 죽은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화해가 슬쩍 드러난다. 오랜 세월 “거울처럼 나를 바라보고”(‘기시감’), “고문에 가까운 이미지”(‘물수제비’)를 견디고,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처럼”(‘소금밭을 걸어가다’) 바닥을 닦고, “나도 모르게 십자 성호를 그”(‘이상한 봄날’)으며 기도하는 동안 “자꾸 신발 뒤축이 목련 나무쪽으로 기”울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꽃은 “꽃이기 전의 꽃”(이하 ‘꽃 몰아가는 힘’)이었고. “나는 나이기 전에 숨”이었음을 상기한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우리는 배꼽을 나누어 가진 사이”(‘불타는 배꼽’)임을 부정할 순 없기 때문이다.

◇우리 허들링할까요=이은 지음. 천년의시작 펴냄. 128쪽/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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