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싸Eat]트럼프 햄버거·김영철 스테이크… '음식의 정치학'

머니투데이 강기준 기자 2019.01.21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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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 '인싸'되는 '먹는(Eat)' 이야기]
식탁 메뉴로 메시지 전달하는 '만찬 외교'…
트럼프 '스테이크' 고집, 소통 부족 지적도

'오늘 만찬은 비공개'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오른쪽)과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왼쪽) /AFPBBNews=뉴스1'오늘 만찬은 비공개'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오른쪽)과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왼쪽) /AFPBBNews=뉴스1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의 지난 17일부터 시작된 2박3일간 방미 일정이 막을 내렸습니다. 지난해 5월말 첫 방미 이후 7개월여 만의 두 번째 방문입니다.

이번 방문에서 관심을 끌었던 건 평소 떠벌리기를 좋아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8일 김 부위원장을 만나 김정은 위원장의 친서를 받고도 침묵했다는 점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뒤늦게 2월말로 예정된 2차 북미 정상회담에 대해 기대감을 표출하며 언론이 이번 만남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데 섭섭함을 드러냈습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번 방미 일정에서는 지난해 1차 방미 때와는 달리 만찬에 대한 소식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김 부위원장은 이번 일정 내내 조용한 행보를 보였습니다. 18일 백악관에서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의 40분 회동, 트럼프 대통령과 90분 면담을 제외하곤 호텔에만 줄곧 머물렀습니다. 이번 방미를 앞두고 언론들이 트럼프 대통령과 백악관 만찬을 가질지 여부를 두고 기대를 했는데, 김 부위원장은 면담 이후 폼페이오 장관과 스티븐 비건 대북정책 특별대표 등과 자신이 머무는 워싱턴DC의 듀퐁 서클 호텔서 늦은 오찬을 가졌습니다. 이 자리에 대한 사진이나 소식은 알려진 게 없지만, 호텔에서 제공하는 메뉴로 식사 자리를 꾸몄을 가능성이 높아 보여 양측은 스테이크 등 양식을 택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국제 외교무대에서는 '만찬 외교' 혹은 '음식 외교'라고 불릴 만큼 만찬 자리는 가장 오래된 외교 수단으로 꼽힙니다. 그날 마련된 음식을 통해 양국이 전하고자 하는 외교적 메시지, 만남의 의미 등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찬도 쉬는 시간이 아닌 회담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에 메뉴 하나하나에 집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에 백악관 만찬이 무산된 이유로는 최근 비핵화 협상을 두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하면서 지난해처럼 살가운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점이 원인으로 거론되지만, '셧다운(정부 일시적 업무정지)' 때문에 백악관에서 만찬을 진행하기 적합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도 이유로 지목됩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취향과 그동안의 만찬 외교 행적을 보면 적어도 어떤 메뉴가 앞으로 테이블에 올라올지 예측할 수 있습니다.

우선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호스트 역할을 맡는 경우 빼먹지 않고 스테이크를 식탁에 올렸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후 워싱턴에서 선택한 첫끼도 바짝 구운 스테이크에 케첩을 찍어 먹는 것이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평소 햄버거와 스테이크를 좋아하는 이유도 있지만, 자신의 정체성이나 다름 없는 '미국 우선주의'를 홍보하는 데에는 미국인들이 즐겨먹는 햄버거나 스테이크를 보여주는 것만큼 큰 효과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미국이다' 화려한 만찬 선보인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 /AFPBBNews=뉴스1'이것이 미국이다' 화려한 만찬 선보인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 /AFPBBNews=뉴스1
지난해 5월말 폼페이오 장관이 김영철 부위원장의 첫 방미를 환영하며 가진 만찬 자리에서도 스테이크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당시엔 봄철 채소와 부라타 치즈가 들어간 샐러드, 옥수수 퓌레를 곁들인 안심 스테이크, 비엔나식 초콜릿 수플레와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올랐습니다. 이날 코스 구성은 미국이 누리는 호화스러움을 상징하는 '파인 다이닝(fine dining)'이었다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양측은 비핵화 협상 기대감이 한껏 부풀어 있는 상황이었고, 폼페이오 장관은 뉴욕 초고층 빌딩에서 식사를 마친 후 김 부위원장에게 뉴욕의 마천루를 보여주는 등 '이것의 북한의 미래'라는 비전을 심어주는 데 주력했습니다.

이후 7월 폼페이오 장관의 3차 방북 당시엔 김영철 부위원장이 만찬 메뉴로 '화답'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당시 메뉴는 크라상과 바게트, 과줄(한과), 김치를 전채 요리로, 치킨, 연어, 송어 등 메인 요리에 버섯과 배추, 옥수수 퓌레가 곁들여 나왔습니다. 후식은 초콜릿 케이크와 인삼차 등으로 한식과 양식의 퓨전 메뉴를 선보이며 북미간 화해 무드와 화합을 상징한다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특히 주목을 끈건 옥수수 퓌레였습니다. 이는 뉴욕에서 폼페이오 장관이 대접했던 것과 같은 메뉴로 외신에선 김 부위원장이 똑같은 음식을 통해 폼페이오 장관에게 화답의 메시지를 보낸 것이란 평가가 나왔습니다.

1차 북미정상회담 때도 소고기는 빠지지 않았지만, 양국 정상이 첫 대면 대화를 한다는 상징성을 담아 한식과 양식이 가미된 퓨전 음식들이 나왔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앞서 김정은 위원장과 햄버거를 먹으며 핵 협상을 하겠다고 밝혔는데, 햄버거는 결국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실 대통령의 해외 순방과 같은 가벼운 외교무대가 아니고서야 이같이 중요한 협상장에서 미국과 자본주의의 상징인 햄버거를 먹는 모습을 보는 건 사실 기대하기 힘든 모습이었습니다. 김 위원장이 햄버거를 먹는다는 건 북한이 미국측의 요구를 수용하고, 시장을 개방한다는 메시지가 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일본 아베 신조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환심을 사는 데 햄버거를 적극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첫 일본 방문 때 아베 총리는 미국산 소고기를 사용해 만든 수제 햄버거를 대접했습니다. 늘 미국을 '친구'로 부르는 아베 총리가 대놓고 친밀한 관계 형성에 나서겠다는 노골적인 메시지를 보낸 것입니다. 이후 트럼프 대통령은 아베 총리를 미국으로 초대해서도 햄버거를 즐겼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초대해서는 토마토 소스가 얹어진 스테이크를 먹기도 했습니다.

미국 언론들은 전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화려한 '음식 정치'에 비해 특정 음식만 고집하는 트럼프 대통령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워싱턴포스트(WP)는 트럼프 대통령의 특정 음식 고집이 산업에 대한 관심 표현이나 화합과 소통 등 여러 메시지를 줄 기회를 놓치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습니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에 입성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시작했던 '만찬 외교 프로그램'을 종료시킨 일이었습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2012년 외국인 지도자들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전국에서 실력있는 셰프들을 초청해 이들에게 알맞은 음식을 선보이는 프로그램을 택했는데,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없애버린 겁니다.

'민주당 때문에 햄버거 먹는다' 홍보하는 트럼프 대통령. /AFPBBNews=뉴스1'민주당 때문에 햄버거 먹는다' 홍보하는 트럼프 대통령. /AFPBBNews=뉴스1
지난 14일 트럼프 대통령은 또 다른 쇼를 선보입니다. 이날 백악관에서 대학 미식축구 우승팀 초청 만찬 행사가 예정돼 있었는데, 트럼프 대통령이 셧다운 때문에 백악관 요리사들이 휴업 중이라며 맥도날드와 버거킹, 웬디스 등 패스트푸드 햄버거를 메뉴로 선정한 것입니다. 햄버거 300개와 수북이 쌓인 감자튀김 앞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보란 듯 포즈를 취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민주당 때문에 손님들을 초청해 패스트푸드를 먹고 있다는 극적 효과를 주려는 것인데, 미국인들이 흔히 먹는 메뉴로 공감대를 끌어올리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맥도날드, 버거킹, 웬디스 등은 위대한 미국 회사"라고 불렀고, 패스트푸드는 "위대한 미국 음식"이라고 언급했습니다. 자신만이 미국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어필한 것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의도대로 일부 지지자들은 그의 '음식 정치'를 보며 정말 미국답다며 자랑스러워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편식은 때때로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거나 소통과 화합의 메시지를 주지 못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어 보입니다.

[인싸Eat]트럼프 햄버거·김영철 스테이크… '음식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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