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안광수씨(신사역 8번 출구 빅이슈판매원·47)이 판매에 나섰다. /사진=강민수 기자
겨울철 한파에도, 여름철 무더위에도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들이 있다. 빅이슈(노숙인 재활을 돕는 잡지) 판매원, '빅판'들이다.
◇"어떤 날씨가 와도 끄덕 없어"… 추위 녹이는 열정
세 사람의 판매터는 각 지하철 역 출구 앞. 매서운 바람을 막아줄 비닐 한 장 없는 야외다. 한파주의보 등이 내릴 때 빅이슈 사무실에서 판매를 하지말라고 권고하는 이유다.
지난 16일, 이민수씨(안암역 3번 출구 빅판·49)가 빅이슈를 판매하고 있다. 그는 "추위에 단단히 대비했다"고 말했다. /사진=권용일 기자
방한 용품도 철저히 준비해뒀다. 안광수씨(신사역 8번 출구 빅판·47)는 빨간색 털모자에 귀마개, 두꺼운 장갑으로 추위를 대비했다. 그는 "오늘 정도면 추운 것도 아니다"라면서 기자를 향해 "혹시 춥냐"고 되물었다.
이들이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빅이슈 판매에 열을 올리는 건 신념 때문이다. 과거 노숙인으로 살았던 상처를 딛고 '빅판으로 열심히 살겠다'는, 나아가 '언젠가는 자립하겠다'는 신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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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씨는 "1997년 IMF 때 가게가 부도나고, 신용불량자가 되면서 3년 간 노숙을 했다"며 "그 뒤 2011년 2월 빅이슈 첫 판매를 하며 2013년엔 폴란드 포츠난 홈리스월드컵에 참여했고, 2015년엔 보증금 150만원을 마련해 장기임대주택에도 들어갔다"고 말했다. 그는 "매일 이 순간을 열심히, 행복하게 살자는 생각으로 임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16일 한 독자가 안씨에게 빅이슈를 구매하고 있다. /사진=강민수 기자
2012년부터 빅판 일을 해온 이씨의 꿈도 비슷하다. 이씨의 최종 꿈은 '빅이슈 판매자'에서 '빅이슈 구독자'가 되는 것이다. 이씨는 "나중엔 한 달에 한 권씩 빅이슈를 구매할 수 있는, 시민이 되고 싶다"면서 "미래 어느 날, 빅판에게 다가가 '나도 옛날에 빅판이었다. 고생 많다. 소명 의식을 갖고 판매하면 당신도 꼭 자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들이 추위에 더욱 끄덕 없는 건 사람들이 보여주는 '따뜻한 마음' 때문이다. 이씨는 "겨울철엔 행인이나 구매자 분들께 매일 최소 1개씩 핫팩을 받거나 홍삼 음료 등 따뜻한 음료를 받는다"면서 "추울 새가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미세먼지가 '나쁨'이었던 전날(지난 15일)엔 미세먼지 마스크도 7개나 받았다고 설명했다. 이씨는 또 "저번엔 판매지 근처 자그마한 포장마차에 한 분이 5000원을 내고 가셨다. 내가 어묵과 따뜻한 어묵 국물을 먹을 수 있도록 말이다"라며 "정말, 너무 감사했다"고 덧붙였다.
임씨도 "감기를 직업병처럼 달고 산다"면서도 "세상에 좋은 분들이 많으니 추위를 느낄 틈이 없다"고 말했다. 추우면 판매량이 증가한다는 이유에서다. 사람들이 착하다보니, 본인들이 고생하는 것에 마음을 써줘서 그렇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임씨는 "우리 세상, 너무 살만하지 않아요?"라며 크게 미소지었다.
지난 16일 임진희씨(용산역 1번 출구 빅판·53)가 빅이슈 판매에 열을 올리고 있다. 판매대 한켠 노랑 봉투에는 그가 사비로 사둔 과자들이 가득하다. 구매자들에게 감사함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사진=이재은 기자
◇"나는 빅이슈 판매자"… 직업정신
이들은 더 잘 판매하기 위해, 더 좋은 모습의 판매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구매자들이 빅이슈를 구매함으로써 애정을 나눠줬듯, 본인들 역시 그 감사함을 돌려주고 있다고도 설명했다.
지난 16일 안광수씨(신사역 8번 출구 빅이슈판매원·47)이 판매에 나섰다. 안씨가 최신호인 195호를 공부하며 적어둔 메모(왼쪽)와 판매대를 정리해둔 모습. /사진=강민수 기자
다른 빅판들 역시 마찬가지다. 임씨 역시 '내용을 알아야 잘 판매할 수 있다'며 내용을 숙지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이날 임씨에게 다가온 한 손님은 "엑소 멤버 디오(D.O.)의 생일 광고 페이지가 들어있는 호가 어떤 호냐"고 물었지만, 임씨는 이를 알지 못해 팔지 못했다. 임씨는 "이렇게, 다 숙지를 해야한다"면서 "다 숙지했는데, 이걸 빠뜨렸네"라며 멋쩍게 웃었다.
지난 16일 오후 6시쯤, 임씨의 판매대에 설치된 구름모양과 파인애플모양 전구가 환하게 불을 밝혔다. 손님들의 이목을 끌기 위함이다./사진=이재은 기자
이씨는 알록달록 빛나는 전구로 가판대를 꾸며놨다. 이씨는 "지난 15일 밤엔 승합차를 타고 지나가시던 분이 창문을 열고 빅이슈를 구매해가셨다"면서 판매 전략이 딱 들어 맞았다고 설명했다.
◇"혼자 있더라도, 혼자가 아니에요"
이들은 '혼자 있더라도 혼자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매우 많은 사람들이 모두 이들을 응원하고 있다는 걸 알기에, 앞으로 더욱 열심히 하겠다는 것.
임씨는 "나를 신경써주는 구매자분들이 참 많다"면서 "신용불량자가 된 기억 때문에 카드 단말기를 안 가져다 둔 나를 위해, 일부러 현금을 뽑아서 찾아와주는 이들부터, '만들다보니 너무 많이 만들었다'며 갓 만든 샌드위치와 김밥을 가져다주는 이들, 일부러 밑반찬을 해다 갖다주는 이들, 판매대가 더욱 예뻐지라고 예쁜 인형을 달아주고 간 이들 등… 그래서 더 열심히 해야한다"고 말했다.
임진희씨(용산역 1번 출구 빅판·53)의 판매대 아래 놓인 인형들. 임씨는 인형에 대해 "구매자분들이 주신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진=이재은 기자
이들에겐 '빅돔'(빅이슈 판매 도우미) 역시 큰 힘이 되는 자활 동반자다. 이날 임씨의 빅돔은 "아니 삼촌, 왜 이렇게 얇게 입고 왔어"라며 임씨를 다그치며 등장한 김모씨(장신대 신학대학원 1학년)였다. 임씨는 "내 조카"라며 김씨를 소개했다. 이어 "진짜 핏줄은 아니지만, 진짜 보다 더 진짜 같은 내 조카다"라고 덧붙였다. 임씨의 조카 김씨는 벌써 2년째 매주 수요일 임씨의 옆을 지키며 함께 판매에 나서고 있다.
김씨는 "삼촌이 열심히 하는 걸 보며 저도 자극을 받아요. 제가 큰 도움이 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제가 올 때마다 저렇게 좋아하고 가끔 시험기간이라 못오면 '언제 오냐'고 투정하는 걸 보면 제가 오는 게 도움이 되는 거 겠죠?"라며 웃었다.
이들은 이처럼 빅돔이 옆을 지켜줘서, 형님이라 부르며 따르는 이들이 일상을 함께 해줘서, 그리고 구매자 분들이 자활을 바라며 따뜻한 마음을 보여줘서, 더 열심히 살고 싶다고 강조했다. "지켜봐주셔야해요, 기자님. 언젠가 제가 자활하는 모습을"이라며 말이다.
2017년 12월4일 빅이슈코리아는 "지난 12월 1일 판매가 시작된 빅이슈 168호가 발매 이틀만에 2종 커버 총 1만 5천권 분량이 완전히 소진됐다"고 밝혔다. 이후 급히 추가 인쇄한 5천권 역시 재고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상태로 단 이틀만의 판매로 올해 최다 판매치를 경신했다. /사진=빅이슈코리아
빅판들도 몇 년 전 빅이슈가 세간의 큰 관심을 받을 때 보다, 유명 연예인들의 재능기부가 적어졌다면서 판매량도 줄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안씨와 임씨는 "2017년 12월, 엑소 카이가 빅이슈 표지모델에 서줬을 때, 판매량이 그야말로 '대박'이었다"면서 "다른 분들도 많이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들은 매주 월~금 오후, 매일 5시간씩 자리를 지킨다. 춥고, 덥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