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날]조선 군인도 겨울은 춥다

머니투데이 한민선 기자, 이강준 기자, 이지윤 기자 2019.01.20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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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더 추운 사람들-②]"몇 십년동안 창고로 썼던 곳을 대기실로…" 열악한 근무환경·불안한 고용승계에 추운 수문장들

편집자주 월 화 수 목 금…. 바쁜 일상이 지나고 한가로운 오늘, 쉬는 날입니다. 편안하면서 유쾌하고, 여유롭지만 생각해볼 만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오늘은 쉬는 날, 쉬는 날엔 '빨간날'

외국인 관광객들이 지난 16일 서울시 종로구에 위치한 광화문 앞에서 수문장과 사진을 찍고 있다./사진=이지윤 기자외국인 관광객들이 지난 16일 서울시 종로구에 위치한 광화문 앞에서 수문장과 사진을 찍고 있다./사진=이지윤 기자


[빨간날]조선 군인도 겨울은 춥다
"정말 추운 날은 '군대 최전방'에 있는 것 같아요. 신발이 냉기를 막아주지 못해 양말을 두 겹 이상 신습니다. 날씨가 추워지면 몇 분만 지나도 발이 저리고, 심할 때는 초기 동상 증세가 오거든요. 회사에서 지급되는 롱패딩이나 장갑 외에 내의나 핫팩은 사비로 충당할 수밖에 없는 것도 고충입니다"(덕수궁·숭례문 수문장 A씨)

20일 업계에 따르면 덕수궁과 경복궁 전통문화행사에 동원되는 인원은 각각 약 70명, 100명이다. 이들은 영하의 날씨에도 하루 2~8회 야외행사(휴일 제외)를 견뎌야 하는 상황이다.



지난 15~16일 덕수궁, 경복궁 등 서울 시내 고궁에서 진행되는 서울전통문화행사 현장을 찾았다.

◇궁궐지킴이 수문장의 겨울…강추위에도 '스탠바이'

덕수궁 '왕궁수문장교대식' 출연자들이 지난 15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덕수궁 앞에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사진=이강준 기자덕수궁 '왕궁수문장교대식' 출연자들이 지난 15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덕수궁 앞에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사진=이강준 기자
서울 중구에 위치한 덕수궁에서는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총 3회, 1시간씩 왕궁수문장교대식이 진행된다. 수문장(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 벼슬) 출연자들은 보통 행사 시작 한 시간 전에 나와 예행연습을 한다.



옷을 5~6겹씩 걸치는 수문장들도 영하의 한파 속에서는 추위에 떨 수밖에 없다. 바깥에 10분 이상만 서 있어도 냉기가 발부터 차오르기 때문이다.

이들은 행사 시작 전부터 가벼운 전통 복장 위에 외투 하나만 걸치고 '스탠바이'를 해야 한다. 덕수궁의 경우 영하 7도 이하로 떨어지는 날에는 행사를 취소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날씨가 급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행사 시작 전까지 영하 7도였던 날씨가 영하 6.9도로 오르면 행사를 강행해야 한다.

덕수궁과 숭례문 수문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A씨(35)는 "날씨가 어떻든 간에 행사 시작 10분 전에 미리 도착해서 세팅을 다 해 놓는다"고 말했다.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경복궁에서 교대의식이 진행되는 모습./사진=이지윤 기자지난 16일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경복궁에서 교대의식이 진행되는 모습./사진=이지윤 기자
경복궁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경복궁에서는 매일(화요일 제외) 총 6회의 전통문화행사가 진행된다.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지더라도 행사를 정상 시행한다. 파수군(파수를 보는 군졸)의 경우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 30분까지 광화문 앞에서 입직 근무를 해야 한다.

지난 16일 경복궁에서 만난 교대의식 행사 몇몇 출연진의 볼은 빨갛게 상기돼있었다. 일부는 재빨리 손을 들어 콧물을 훔치기도 했다. 전통문화행사를 관람하던 관광객들은 "멋있다"는 감탄사와 함께 연신 "진짜 춥겠다"라는 말을 내뱉었다.

이날 행사에 출연한 김민성씨(32)는 "춥지만 많은 관람객이 지켜보기에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며 "멋있게 보이기 위해 이를 악물고 참는다"고 말했다. 김씨는 행사에 출연하기 전 전통 복장을 제외하고 상의 4겹, 하의 3겹을 껴입어 추위를 대비한다. 양말도 2겹이나 신는다. 살을 에는 찬바람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핫팩도 필수다. 김씨는 "기본으로 핫팩 2개 정도 가지고 나온다"며 "뒷목에 대놓거나 배에 둬 따뜻하게 한다"고 말했다.

보신각 타종행사, 남산 봉수대 봉화의식, 숭례문 파수의식 등 다른 전통문화행사 출연자들도 비슷한 상황이다. 이들은 지정된 휴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1~2회 사비로 마련한 내의를 껴입고 관객들 앞에 서야 한다.

◇"국보 1호를 지키는 사람들이" 지하보도 대기실에 손발 꽁꽁

지난 16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숭례문 근처 행사 출연자 대기실 모습. 숭례문 근처 지하도 입구에 위치한 대기실 모습(사진 1,2) 행사를 마치고 돌아온 근무자들이 대기실에서 쉬고 있다(사진 3)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수문장들이 의상을 갈아 입고 있다(사진4)./사진=이강준 기자지난 16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숭례문 근처 행사 출연자 대기실 모습. 숭례문 근처 지하도 입구에 위치한 대기실 모습(사진 1,2) 행사를 마치고 돌아온 근무자들이 대기실에서 쉬고 있다(사진 3)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수문장들이 의상을 갈아 입고 있다(사진4)./사진=이강준 기자
이들은 행사가 끝나도 따듯한 휴식을 취할 수 없다. 특히 숭례문 근무자들이 환복, 식사 등 생활 전반을 하는 숭례문 근처 대기실은 지하보도에 있어 겨울철에 전혀 추위를 피할 수가 없는 곳이다.

실제 기자가 지난 16일 숭례문 대기실을 들어갔을 때 방안엔 냉기가 가득했다. 기껏해야 성인 3명이 누우면 가득 찰 것 같은 공간에 온열기 두 개로 방을 덥히고 있었다. 창문이 없어 환기를 위해 문을 열면 지하보도에서 '황소바람'이 매몰차게 들어왔다.

이 대기실에서 생활하는 B씨(48)는 "몇 십년동안 창고로 썼던 곳을 대기실로 사용하다 보니 냉기에 완전히 취약한 구조"라며 "국보 1호를 지키는 사람들이 이런 공간에서 대기를 하고 있다는 게 국가 이미지에 맞는 건지 모르겠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출연자들은 "자부심 하나로 버틴다"고 입을 모았다. 김씨는 "경복궁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로, 행사 자체가 하나의 관광 콘텐츠"라며 "외국인들은 평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장소이니 최선의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한다"고 밝혔다.

행사 담당자들도 서울을 대표하는 전통문화행사인 만큼 쉽게 행사를 취소하거나 축소하지는 못하는 상황이다. 한 덕수궁 가이드는 "한국에 여행 온 외국인들은 평생에 한 번 볼까말까한 기회라 행사가 취소되면 아쉬워하는 경우가 많다"며 "국가 이미지 손해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고용승계에 대한 우려 늘 있어"…겨울이 더 추운 이유
경복궁 수문장의 모습./사진=이지윤 기자경복궁 수문장의 모습./사진=이지윤 기자
전문가들은 문화재청이나 서울시 차원에서 수문장의 열악한 근무환경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의견을 모았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전통문화행사 출연진이 대행업체 소속이더라도 원청 격인 문화재청이나 서울시가 이들에 대한 처우를 보장하도록 해야 한다"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금과 같은 처우 상의 문제점은 계속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조성주 서울시 노동협력관은 "노동안전이라는 측면에서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며 "서울시 차원에서 해당 노동자들이 적절한 근무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점검하고 검토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궁궐지킴이 수문장의 겨울이 더 추운 이유는 고용 불안 때문이다. 이준형 서울시의회 의원에 따르면 출연자 대부분이 용역직으로 근무한다. 서울시는 12개월마다 출연자 고용 관련 대행사 입찰 경쟁을 진행하는데, 대행사가 바뀌면 수문장들은 다시 회사와 계약을 맺어야 한다. 근무자들은 매년 연말마다 대행사 간 고용 승계 여부를 두고 마음을 졸인다.

수문장 처우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이준형 서울시의회 의원은 "주말 근로수당, 휴일수당이 전혀 없고 고용 승계에 대한 우려가 늘 있다"며 "수문장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서 서울시 상임위원회에서 정규직 전환이 맞는 방식인지 논의를 진행 중"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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