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발매 음반 중 들어야 할 단 '한 장의 음반'

머니투데이 김고금평 기자 2018.11.30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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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집시기타리스트 박주원 4집 ‘The Last Rumba’…버릴 것 없는 탄탄한 구성과 선율, 이토록 가슴 때리는…

최근 4집 낸 집시 재즈기타리스트 박주원. /사진제공=JNH뮤직<br>
최근 4집 낸 집시 재즈기타리스트 박주원. /사진제공=JNH뮤직


대체 어떤 수작(酬酌)을 부렸길래, 이런 수작(秀作)이 나왔을까. 그의 능력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지만, 이 음반처럼 지난 작품의 지울 수 없는 그림자를 뒤덮을 선율과 구성, 청자(聽者)의 심장을 흔드는 작품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첫 곡부터 마지막 곡까지 단 한 곡도 대충 흘려듣기를 허락하지 않는 그 미학에 수없이 놀랐다. 무엇보다 각 곡이 지닌 선율의 주제의식이 또렷해 무슨 일을 하다가도 음악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흡인력이 강하고 특유의 속주에서도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클래식적인 아름다움이 뼛속까지 배어있다.



전작과 다른 가장 큰 특징은 곡의 구성력이 깊이와 넓이를 모두 껴안아 이 뮤지션의 공력을 다시 한 번 눈여겨보게 됐다는 점이다.

5년 만에 내놓은 집시 기타리스트 박주원의 4번째 음반 ‘더 라스트 룸바’(The Last Rumba)는 어느 정도 예견했던 기대치 이상의 ‘무엇’을 보여준 걸작 중 걸작이다. 올해 나온 수백 장 음반 중 단 하나의 음반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선택할 정도로, 오랫동안 기억될 작품이다.



‘테크닉 기타리스트’로 곧잘 수렴되던 그가 이렇게 클래식적이고, 내면 밑바닥에 죽어있던 애잔한 감정을 되살릴 수 있는 아티스트였던가. 제3 세계에서나 볼 법한 빠른 리듬 앞에서 눈물이 글썽거리는 묘한 기분을 안겨 준 그가 조금 원망스럽기도 했다.

박주원은 “30대 마지막 해를 보내면서 비장한 마음을 담아 ‘최후의 룸바’라는 이름으로 연주했다”며 “1, 2집 땐 젊은 혈기로 음반을 만들었다면 이번엔 지금까지 수년간 연습했던 걸 응축해서 보여준 음반”이라고 했다.

집시 재즈기타리스트 박주원(왼쪽)과 가수 윤시내. /사진제공=JNH뮤직<br>
집시 재즈기타리스트 박주원(왼쪽)과 가수 윤시내. /사진제공=JNH뮤직
음반의 형식은 오로지 ‘기타’였던 전작과 달리, 실험의 흔적이 곳곳에 스며있다. 판소리도 있고 오케스트라도 있고 심지어 박주원 자신이 프로그래밍한 일렉트로닉 드럼 사운드도 있다.


이런 실험이 ‘좋은 음반’을 향한 증거가 되진 않는다. 실험은 때론 아티스트의 새로운 면목을 보여주는 현장이지만, 자칫 낯선 응용으로 대중과의 거리를 더 멀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박주원의 실험이 탄성을 부르는 것은 그 조화가 눈부시게 ‘아름답다’는 데 있다. 4집에서 가장 실험적이고 아름다운 서사를 지닌 ‘Eurasia express’(유라시아 익스프레스)는 ‘젊은 소리 명인’ 유태평양이 피처링으로 참여해 수궁가의 한 대목을 호쾌하게 부르는 데, 그 너머로 보여주는 구성의 긴장감이 듣는 이의 호흡을 쥐락펴락한다.

8분의 6박자로 밀도 있게 쪼개지는 리듬이 파도 타듯 넘실거릴 때, 수궁가가 들어오는 ‘찰나의 끼어듬’도 구성지지만, 이 대목에서 기타가 박자 6개를 3개씩 나눠 뒤 3박자를 6연 음으로 연주하는 놀라운 '신공'이 두 장르의 합을 절정으로 끌어올린다.

그 장면이 기승전결의 ‘전’이라면 ‘결’에서 보여주는 애상의 리프(riff·반복 악절)는 가슴 깊숙이 쇠꼬챙이 하나 박아넣는다. 해금과 기타가 엮는 선율이 이렇게 슬프고 눈부시다는 걸 깨닫게 해주다니. 에릭 클랩튼의 ‘레일라’(Layla) 후렴에서 반복되는 피아노 연주가 세계인의 심금을 반세기 간 울렸다면, 다음 차례는 이 곡이 될 듯했다.

집시 재즈기타리스트 박주원이 최근 열린 4집 발매 간담회에서 신곡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제공=JNH뮤직<br>
집시 재즈기타리스트 박주원이 최근 열린 4집 발매 간담회에서 신곡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제공=JNH뮤직
플라멩코 기타의 거장 비센테 아미고에게 바치는 첫 곡 ‘마애스트로, 아미고’(Maestro, Amigo), 해군 출신 박주원이 연평해전과 천안함 희생자를 위해 만든 추모곡 ‘송 포 더 웨스트 시멘’(Song for the West Seamen) 등 갖가지 사연이 붙은 곡들은 그 의미를 알고 들어도 좋지만, 모르고 들으면 감동이 곱절로 늘어난다.

앨범명과 같은 3번째 곡 ‘The Last Rumba’는 스트링과 브라스, 기타가 움직이는 리듬이 절묘하다. 4번째 곡 ‘어 보링 데이’(A Boring Day)에선 클래식 미뉴엣 악장을 넘기듯 클래식적이면서 세련된 분위기가 넘친다.

몇 앨범에서 구성의 한 부분으로 큰 역할을 했던 ‘보컬 장인’과의 협연은 새 음반에서도 이어졌다. 뮤지컬 같은 구성과 카멜레온 색깔을 자랑하던 윤시내가 그 주인공. ‘10월 아침’(이주엽 작사, 박주원 작곡)에서 그의 소리는 가을 낙엽처럼 쓸쓸히, 그러나 잿빛을 가린 듯 묵묵히 읊조린다.

‘나 눈을 뜨니 창밖에 서늘한 바람이/저기 손 내밀면 잡힐 듯 가까운 하늘/내 곁의 시간들이 조금씩 멀어지는 소리/언젠가 헤어져야겠지 아름다운 날들~’ 시구처럼 멋진 가사를 음미하며 듣는 절제된 목소리 앞에서 눈물을 거두지 않기를. 슬픔을 만끽하며 마음껏 쏟아낼 자유를, 우리는 언제 무엇으로부터 얻어봤을까.

‘기쁨도 슬픔도 넘치는 사랑도 잠시만 머무는 것/가슴에 스미는 시월의 꿈들도 언젠가 떠나겠지/웃음도 눈물도 빛나던 기억도 지나면 그만인 것/시월의 빛이여 마지막 한 줌은 날 위해 남아주길~’('10월 아침' 후렴)

올해 발매 음반 중 들어야 할 단 '한 장의 음반'
윤시내는 박주원이 준 곡을 차 안에서 200번 넘게 들으며 해석했다. 장인은 그렇게 탄생한다. 노래 곡이 끝나고 이어지는 후반부 곡들까지 대충 ‘끼워 넣은’ 곡들이 새 음반에선 단 하나도 없다. 어쩌면 박주원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한순간의 에너지를 이 한 장의 음반에 모두 쏟아 부은 듯한 모습이 그대로 투영됐다고 할까.

박주원은 “집시를 연주하지만, 한국인이 연주하는 집시를 하고 싶다”며 “연주할 땐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한다”고 했다.

음반 한 장을 수 시간, 며칠째, 또 한 달간 듣는데도 그 미학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휴일 무거운 아침잠을 살포시 깨우고, 나른한 일상에 지친 무감각에 활력을 주며 외로움에 지쳐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내 안의 슬픔을 스스럼없이 토하라고 일러주는 동반자를 실로 오랜만에 만났다. 이런 역작을 내고도 그는 별것 아니라는 듯 음악적 얘기는 별로 하지도 않는다.

TV에만 출연하면 모두 ‘아티스트’가 되는 이상한 시대에, 진정한 아티스트의 정의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그가 반갑고 또 놀랍다. 더욱 놀랍고 자랑스러운 것은 그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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