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찾은 서울 영등포구의 한 수면카페 내부의 모습. 조용하고 어두운 분위기의 공간은 좌석 별로 칸막이가 있어 프라이버시가 보장됐다. /사진= 유승목 기자
목숨이 촌각을 다투는 전쟁통에서도 '충분한 수면'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매일 총성 없는 전쟁을 치르며 만성 수면부족에 시달리는 직장인들에게 처칠의 낮잠은 한가한 소리로만 들린다. 잠을 잘 수 있는 시간도, 공간도 부족하기 때문. 이에 일부 직장인들은 아예 점심식사를 포기하고 수면카페를 찾아 돈을 내고 잠을 사기도 한다.
◇바쁜 직장인 "잠이 모자라"
한국인의 수면부족은 이미 유명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2016년 한국인 평균 수면 시간은 7시간41분에 불과하다. OECD 평균(8시간22분)보다 41분이나 덜 자는 것으로 1년으로 따지면 1만4965분이나 된다.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무려 10일 넘게 깨 있는 것이다.
바쁜 일상으로 생긴 만성 수면부족은 고통을 낳는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수면부족은 비만과 당뇨, 심장질환, 우울증 등의 각종 질병과 연관 깊다. 심할 경우 치매까지 부를 수 있다. 효율적인 업무에도 지장을 준다. 직장인 김모씨(33)는 "잠이 부족해 두통이 심해져 일에 집중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며 "못다 한 일을 마무리하려고 야근하면 또 수면시간이 부족해 악순환의 반복이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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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두각을 드러내는 것은 일정 비용을 받고 수면 공간을 대여해주는 서비스인 '수면 카페'다. '빠르게 힐링한다'는 뜻으로 '패스트힐링'(Fast healing) 으로도 불린다. 짧은 낮잠으로 수면을 보충할 수 있어 많은 직장인들에게 인기다. 회계사 김모씨(28)는 "점심을 포기하고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수면카페를 이용한 적이 있다"며 "쌓여 있는 피로를 풀 수 있어 좋았다"고 말했다.
직장인이 낮잠을 사러 간다는 수면카페는 어떤 곳인지 알아보기 위해 지난 15일 오전, 서울 여의도를 찾았다. 수능 시험으로 온 나라가 조용했지만 증권사를 비롯, 많은 기업이 밀집한 여의도의 지하철과 거리는 직장인의 발걸음으로 분주했다. 직장인의 표정에는 졸음이 가득했다.
수면카페는 증권가 한복판에 있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서 본 첫 모습은 여느 카페들처럼 밝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벽에 걸린 메뉴판은 일반 카페와 달리 '잠'을 팔았다. 안마의자 30분과 음료 1잔이 7500원이었고 편한 자세로 잠을 잘 수 있는 리클라이너가 1시간에 6000원이었다. 직장인 평균 점심값 7000~8000원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지난 15일 찾은 수면카페에서 안마의자를 체험했다. /사진= 유승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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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시30분 서비스를 받는 중 계속해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점심시간이 시작되자마자 달려온 손님들이었다. 정오가 되자 리클라이너룸은 복도쪽을 제외하고 만석을 이뤘다. 카페를 찾은 여성 동료 직장인 세 명은 함께 카페를 방문해 자연스럽게 각자 원하는 곳으로 흩어져 휴식을 취했다. 카페 관계자는 "총 60석 정도인데 월요일을 빼면 평일 낮에는 직장인들로 거의 꽉 차서 기다리는 손님도 있다"며 "아예 정액권을 끊고 자연스럽게 점심시간마다 찾는 직장인도 상당수"라고 말했다. 이어 "점심시간이 지나면 인근 자영업자들이 들러 낮잠을 청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딱 20분이면 보약 한 첩
수면카페는 여의도뿐 아니라 강남, 광화문 등 서울 내 직장인 밀집 지역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신한트렌드연구소가 지난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수면카페 등 패스트힐링업의 2016년 카드 결제액은 전년 대비 135%나 성장했다. 2015년 국내 최초로 수면카페를 연 '미스터힐링'은 3년 만에 가맹점 수가 100개를 돌파했다. 여의도 CGV는 지난해 중단한 '시에스타'(Siesta·낮잠) 서비스를 직장인들의 성화에 다시 재개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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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의 낮잠이 지친 몸의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점도 직장인들이 기꺼이 돈을 내고 잠을 사는 이유다. 이날 카페를 찾아 안마의자에 몸을 맡긴 직장인 최모씨(30)는 "잠깐이지만 걱정 없이 푹 자고 일어나면 몸이 정말 개운하다"고 말했다. 실제 잠깐의 낮잠은 큰 도움이 된다. 1995년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26분의 낮잠으로 업무수행 능력과 집중력이 각각 34%, 54% 증가한다"고 밝힌 바 있다.
다만 낮잠이 항상 올바른 답은 아니다. 개인마다 특성이 다르긴 하지만 전문가들은 대체로 30분 이상의 낮잠을 피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지나치게 오래 자거나 깊게 잠들면 회복시간이 더뎌 오히려 업무에 복귀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 전홍준 건국대학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낮잠을 자더라도 가장 졸린 시간과 근무 리듬, 사회적 환경 등을 고려해 규칙적인 시간에 20분 내외로 자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