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향자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장/사진=권혜민 기자
1985년 삼성 입사 이래 그가 걸어온 30년은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이라는 수식어를 떼 내는 역사였다. 늘 "여자는 할 수 없어"라는 편견에 맞서 싸웠다. 기술 분야, 특히 그가 일했던 반도체 메모리설계실은 '금녀(禁女)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곳이다. 북한의 아오지탄광에 빗대 '아오지'라고 했을 정도다. 밤샘근무가 이어지는 만큼 체력적으로 여성은 따라가기 힘들 것이라는 인식이 컸다. 남성 중심의 업무환경에서 형성된 군대문화도 한 몫 했다.
직접 반도체 업계에서 일해보니 '여성은 할 수 없다'는 생각은 고정관념에 불과했다. 양 원장은 "예측가능하고 섬세하며 의견 조정과 멀티태스킹 능력을 갖춘 여성의 특별한 역량들을 잘 드러낼 수 있는 곳이 반도체였다"며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반도체 분야에서 여성은 훨씬 뛰어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양향자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장/사진=권혜민 기자
양 원장도 똑같은 어려움을 겪었다. 연구보조로 시작했기 때문에 일·가정의 양립이 아니라 학업까지 삼립(三立)을 이뤄내야만 했다. 하지만 가장 힘들었던 건 '인식'이었다. 양 원장은 "함께 하자는 인식이 있다면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밤을 샐 수 있는데, 늘 '여자들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전제돼서 마음 고생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오기로 버텼다. 남성들보다 더 강도 높게 일했다. 하지만 다른 여성들은 같은 길을 걷게 해선 안된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기술인에서 정치인으로, 공무원 교육기관의 장으로 자리를 옮긴 것도 그래서다. "여성이 아이도 제대로 키우고 일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돕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2016년 당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영입으로 정치에 입문했고, 지난 8월부턴 국가에 봉사하는 인재 양성의 요람인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의 원장을 맡고 있다.
양 원장은 "여성의 능력을 배가시키려면 육아 부담 등을 최대한 없애주는 편안한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며 육아휴직 제도 등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각 분야의 여성 비율을 높이는 노력도 중요한 과제로 꼽았다. 그는 "어떤 조직이든 여성이 10명 중 3명은 있어야 제대로 역량을 평가 받을 수 있다"며 "암묵적으로 남성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분야라도 우선 여성을 배치하면 그에 맞춰 사회가 변화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특히 이공계 분야에 대해선 "4차 산업혁명으로 산업의 유형과 일자리가 바뀌며 불안감이 높아지자 여학생들의 이공계 진학도 줄어들고 있다"며 "산업에 대한 전망과 기술 분야의 커리어를 정부 차원에서 알려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를 위해선 과학기술계 여성들의 활약상을 발굴하고 소개할 필요가 있다고도 했다.
양 원장의 모토는 '뜻이 있으면 일이 이루어진다'라는 뜻의 '유지사성'(有志事成)이다. 양 원장은 이를 소개하며 "정부 정책은 '유지유도'(有志有道)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즉 뜻이 있으면 길을 만들어주고, 어떤 길이 있다는 걸 알려줘야 한다는 얘기다. 그는 "여성 과학기술인들이 용기 있게 나오는 사회가 되려면 그들에 맞춘 정책을 통해 희망의 사다리를 마련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