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목이야"…'진단서' 한장에 250만원 '뚝딱'

머니투데이 김종훈 기자 2018.10.26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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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 [Law&Life-'진단서'의 진실 ①] 대법원 판례 "특별히 의심할 사정 없으면 '진단서' 증거 인정"…'나이롱 진단서' 악용 우려

/그래픽=이지혜 디자인기자/그래픽=이지혜 디자인기자


#A씨는 지난달 서울 시내의 한 사거리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빨간불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뒤에서 달려오던 차가 그대로 A씨 차를 받았다. 많이 놀라긴 했지만 충격은 크지 않았다. 충돌 후 상황을 확인하려고 차에서 내리던 찰나, A씨 머리 속에 '보상금' 생각이 스쳐갔다.

A씨는 평소 듣던대로 '뒷목'부터 잡았다. 현장에 나온 보험사로부터 상대 운전자의 100% 과실임을 확인하고 병원으로 직행했다. 큰 이상이 느껴지진 않았다. 의사에게 목 부근에 통증이 있다고 말했더니 전치 2주짜리 진단서가 나왔다. A씨는 이 진단서를 보험사에 내고 보상금으로 250만원을 받았다. A씨는 "돈을 받아서 좋긴 한데 2주짜리 진단서 한 장 갖고 이렇게 일이 처리돼도 괜찮은건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2만원 짜리 일반진단서도 증거

의사의 진단서는 A씨와 같은 교통사고 보험 처리부터 상해 관련 고소 사건, 산업재해 처리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활용된다. 가장 흔하게 쓰이는 진단서는 일반진단서와 상해진단서 2가지다.



일반진단서는 환자가 호소하는 병명과 발병일, 치료의견 등이 기재된 문서다. 이와 달리 상해진단서는 외부의 충격이나 폭행으로 인해 환자가 상해를 입었음을 전제하고 작성하는 문서다. 언제, 어떻게 상해를 입었는지 일반진단서보다 자세하게 기록된다.

상해진단서가 상해를 당했음을 전제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두 진단서는 실제 소송에서 큰 차이가 없이 취급된다. 그래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상해 사건에서도 값이 싼 일반진단서가 더 자주 활용된다. 보건복지부 고시에 따르면 일반진단서를 발급 받는 데 드는 돈은 2만원이다. 반면 전치 3주 미만 상해진단서는 10만원이고, 전치 3주 이상은 15만원이다.

주로 문제가 되는 건 전치 2주짜리 진단서다. A씨처럼 환자가 통증을 호소하지만 육안이나 방사선 촬영으로 봐도 뚜렷한 이상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 대개 전치 2주짜리 진단서가 발급된다. 이 진단서만 갖고는 실제 피해가 있었는지 확인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전치 2주짜리 진단서라도 법적으로는 '의사의 진술서' 정도의 효력을 가진다.


그래서 보험사와 수사기관에 진단서를 제출하면 대체로 피해를 인정해준다. 대법원도 판례를 통해 "상해진단서 발급 경위에 특별히 신빙성을 의심할 만한 사정이 없는 한 상해진단서는 피해자의 진술과 더불어 상해 사실에 대한 유력한 증거가 되고 합리적 근거 없이 증명력을 함부로 배척할 수 없다"고 밝힌 바 있다.(2010도12728)

◇보험사와 유착된 일부 의사들


그러나 모든 사건에서 진단서가 쉽게 증거로 인정되는 건 아니다. 거짓 피해를 꾸며내려고 진단서를 악용하려는 경우가 있어서다. 오피스텔 세입자에게 전치 2주의 상해를 입힌 혐의를 받았던 B씨의 사건(2016도15018)에서 대법원은 상해진단서 내용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무죄 취지의 파기환송 판결을 내렸다. 세입자가 B씨에게 악감정을 품고 B씨를 고소하기 위해 거짓으로 허리 통증을 호소하고 상해진단서를 받아냈다는 판단에서다.

이 사건에서 대법원은 "상해진단서가 피해자의 주관적인 호소 등에 의존해 의학적인 가능성만으로 발급된 때에는 상해진단서 발급 경위에 특별히 신빙성을 의심할 사정은 없는지, 상해진단서 발급 근거 등을 두루 살펴야 한다"며 "피해자가 진료를 받은 시점과 진료경과 등을 면밀히 살펴 증명력을 판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진단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하려면 진단서를 제출하고 나서 제대로 치료를 받았는지 같은 사정도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보험사도 '의료자문' 제도를 이용해 진단서를 가려내고 있다. 의료자문이란 보험사가 보험금 지급 여부를 결정하기 전 보험금을 청구하는 고객 쪽에서 제출한 진단서 등 자료에 문제는 없는지 전문의의 소견을 받아보는 것을 말한다.

고객 쪽에서 제출한 진단서를 믿기 어렵다는 결과가 나올 경우 보험사와 고객 사이에 소송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때부터는 진단서보다 의료감정의 결과가 중요해진다. 법원은 원고와 피고 양측의 의료진 소견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타당한지를 따지기 위해 의료감정을 통해 제3자인 의료인의 소견을 받는다. 어느 의료인의 소견을 받을지는 미리 법원에서 지정한 의료인들 중에서 추첨식으로 정한다. 대부분은 법원 관할지역 내 대형병원에 소속된 의사들이다.

문제는 의사나 병원들이 보험사와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지난해 금융소비자연맹(금소연)은 보험사들이 의료인들에게 연간 9만건 정도의 의료자문을 받고 그 대가로 180억원 상당의 자문료를 지급하고 있다고 추산했다. 금소연에 따르면 자문비는 보험사에서 원천세를 공제하고 의료인에게 지급하기 때문에 어느 의사가 어느 보험사로부터 얼마나 보험료를 받았는지 추적하기 어렵다. 법원 입장에선 어느 의사가 어느 보험사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판사들도 소송 중인 보험사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의료인에게 의료감정을 요청하게 되는 일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재경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의사과 소속 병원, 보험사 사이의 관계를 파악해 공정성을 담보하기 어렵다고 판단되는 의사는 처음부터 의료감정 인력에서 제외할 필요가 있다"며 "사적인 이해관계를 끊고 법원이 요청하는 의료감정만 수행할 수 있는 의료인력의 풀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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