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위의편지]한탄강의 은밀한 가을

머니투데이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2018.10.20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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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히 흐르는 강물.유유히 흐르는 강물.


철원으로 가는 길,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추수를 끝낸 철원평야의 너른 논들이 텅 비어 있다. 하지만 결핍이 아닌 풍요의 비움이다. 비어 있어서 가득 차 보인다는 역설을 들판에서 읽는다. 차를 천천히 몬다. 눈에 풍경을 담으려는 목적도 있지만, 안개가 짙어서 빨리 달릴 수도 없다. 이 계절의 강들은 안개를 대량으로 생산한다. 기온이 먼저 낮아지는 북쪽일수록 더욱 그렇다. 안개 속에 갇힌 풍경은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이기도 하다.

높은 곳에서 바라본 한탄강의 아침.높은 곳에서 바라본 한탄강의 아침.
새벽을 달려 도착한 오늘의 최종 목적지는 한탄강이다. 고석정이 있는 마을은 안개를 덮고 고요하게 잠들어 있다. 나는 이런 시간이 좋다. 아무도 없는 곳의 시간과 공간을 독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유의 욕심을 내지 않기 때문에 더욱 넉넉하다. 걸음을 강 쪽으로 옮긴다. 한탄강은 여전히 안개를 꾸역꾸역 토해내고 있다. 조금만 더 몸을 들이밀면 나 자신도 안개 속으로 지워질 것 같다. 동쪽에서는 두터운 안개를 조금씩 밀며 해가 떠오르고 있다.



물안개를 피워올리는 강물물안개를 피워올리는 강물
언덕 위에서 내려다본 강은 아득하게 멀다. 한탄강 특유의 협곡 지형 때문이다. 거기다 물안개까지 피어오르니 아득함이 더할 수밖에. 그래서 더욱 황홀한 풍경이다. 희미하게 보이는 강가의 나무들은 한창 단풍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다. 봄에도 여름에도 이곳에 와봤지만, 아무리 후하게 점수를 줘도 가을 풍경을 따라가지 못할 것 같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간다. ‘안개공장’을 직접 견학하러 가는 셈이다. 계단을 내려가다 보면 맨먼저 만나는 게 고석정이다. 이 정자는 신라의 진평왕과 고려의 충숙왕이 놀고 갔다는 곳이다. 왕들이 찾았다니 그만큼 풍경이 뛰어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곳에도 비극이 있었다. 원래 나무로 지은 정자였는데 6·25전쟁 때 불타는 바람에 지금의 시멘트 정자로 다시 지었다. 요즘은 수리를 하느라 어수선하다. 들러서 전망을 보고 싶지만 내쳐 내려가는 수밖에.

강은 가까이 가도 쉽사리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휴전선을 가로질러 오느라 한탄이 깊어진 탓일까. 하지만 이 강은 한숨과 탄식의 恨歎江이 아니라 큰 여울이라는 뜻의 漢灘江이다. 그런 줄 알면서도 자꾸 탄식 쪽으로 마음이 쏠린다. 여전히 분단의 비극 속에 살기 때문일 것이다. 강가에 우뚝 솟은 10여m 높이의 바위가 안개 속에 장엄하다. 이곳의 주인공인 고석(孤石)이다. 외로운 돌이라니, 무엇이 그리 외로웠을까. 바위는 발을 물에 담그고 머리에는 소나무들을 이고 묵묵히 서있다.

끊임없이 물안개를 피워 올리는 강가를 걷는다. 화산 폭발로 형성된 현무암 지대라 바위마다 돌마다 구멍이 숭숭 뚫렸다. 현무암은 자신이 태어난 내력을 온몸에 그려놓기 마련이다. 협곡 양쪽으로 깎아지른 절벽이 상류를 향해 치닫고 그 사이를 강물이 도도하게 흐른다. 이런 풍경 앞에는 입을 다물고 자연이 전하는 말이나 가슴에 담는 게 상책이다.


이곳에서 듣고 보고 싶었던 것은 강에 뿌리를 두고 누대를 살아온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어느 시대에도 평범한 사람들의 기록은 남지 않는 법. 다만 고석정을 근거지 삼아 도적질을 했다는 한 사내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는 백성들로부터 의적이란 말을 들었다. 바로 조선 명종 때의 도적 임꺽정 이야기다.

한탄강 인근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임꺽정이 고석 한가운데의 석굴에 은거하며 활동했다고 한다. 대낮에 도둑이 활보하고, 등을 치고 죽이는 걸 예사로 아는 세상에, 의적이란 말은 은근한 희망을 내포한다. 철원에서 활약했다는 임꺽정은 역사에 등장하는 그 임꺽정이 아닐지도 모른다. 가난하고 핍박받는 민중이 희망 삼아 만들어낸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허구의 도적까지 만들어 위안을 받으려고 했던 옛사람들의 부박한 삶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 온다.

‘외로운 돌’이라는 뜻의 고석(孤石). 고석정의 이름이 여기서 왔다.‘외로운 돌’이라는 뜻의 고석(孤石). 고석정의 이름이 여기서 왔다.
강가 바위에 앉아 흐르는 물에 시선을 준다. 물이 천천히 흐르니 시간도 천천히 흐른다. 강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어서 더욱 두렵다. 조금 전에 만난 가게 주인은 해마다 여름이면 한 둘씩은 희생된다고 강의 무서움을 역설했다. 대부분 물이 얕은 줄 알고 부주의하게 뛰어들기 때문에 그런 비극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물이나 사람이나 속을 안다는 게 참 어렵다. 작은 물고기들이 헤엄을 치고 있다. 가까이 가도 경계할 줄 모른다. 임꺽정은 관군이 쳐들어와 잡힐 것 같으면 꺽지라는 물고기로 변해 몸을 숨겼다지? 그렇다면 혹시 이들이 임꺽정의 후손? 물고기가 답을 해줄 리는 없다.
건너편 강가에는 다녀간 사람들이 쌓은 작은 돌탑들이 서있다. 누구는 정성을 다해, 누구는 장난스럽게 쌓았겠지만 어느 손길인들 소망 한 자락 안 담았으랴. 통일이든 평화든, 개인의 안락이나 부를 빌었든 모두 이뤄지기를. 고석을 돌아 작게 형성된 모래밭을 걷는다. 안개가 조금씩 물러나면서 황금빛 가을햇살이 빈자리를 차지한다. 모래알 같은 생각들을 훌훌 털어내고 은밀하면서도 화사하게 펼쳐진 가을풍경을 몸과 마음에 가득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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