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동살롱] 엇갈린 '묵시적 청탁' 판단… 대법원 판단에 '이목집중'

머니투데이 황국상 기자 2018.10.0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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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 이재용 사건에서 인정 안된 '묵시적 청탁', 신동빈 사건에서는 인정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 사진제공=뉴스1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 사진제공=뉴스1


"피고인과 대통령 사이의 청탁의 대상이 되는 롯데그룹의 현안인 '월드타워 면세점 특허 재취득'과 관련된 대통령의 직무집행 내용과 피고인이 K스포츠재단에 지원한 70억원이 그 직무집행에 대한 대가라는 점에 대해 공통의 인식이나 양해가 있었다고 보기에 충분하다."(2018년 10월5일, 서울고법 형사8부, 신동빈 롯데회장 뇌물공여 사건 선고공판)

"박근혜 전 대통령이 포괄적 현안으로서의 승계작업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다거나 박 전 대통령과 피고인 이재용 사이에 포괄적 현안으로서의 승계작업을 매개로 승마, 영재센터, 재단 지원을 한다는 묵시적 인식과 양해가 있었다고 볼 수 없다."(2018년 2월5일, 서울고법 형사13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뇌물공여 사건)



지난 5일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에 대한 뇌물공여 혐의를 받는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집행유예로 풀려나면서 '국정농단' 관련 사건으로 기소된 대기업 총수 2명이 모두 석방됐습니다. 지난 2월 법정구속된 이후 8개월만에 석방된 신 회장은 짧은 휴식을 마치고 곧바로 경영 일선에 복귀할 예정입니다.

신 회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박 전 대통령과 최씨에게 '뇌물'을 건넸다는 혐의로 기소돼 수개월 간의 수감 생활을 거친 후 2심에서야 풀려났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법원으로부터 '박 전 대통령과 최씨의 뇌물 요구에 마지못해 응했다'는 판단을 얻어낸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서울고법의 다른 재판부가 각기 내린 두 사람에 대한 판결은 내용에서는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묵시적 청탁'에 대한 판단입니다. 신 회장과 이 부회장 모두 대놓고 "이 현안을 해결해달라"고 요구한 게 아니라는, 명시적 청탁이 없었다는 점은 같습니다. 대놓고 말하지 않았다더라도 '불감청 고소원'(감히 청하지 못한 바람) 식으로 청탁이 오간 게 아닌지에 대한 판단이 달랐다는 얘기입니다.

서울고법 형사8부는 신 회장 사건에서 "대통령의 직무집행 내용과 피고인이 K스포츠재단에 지원한 70억원이 그 직무집행에 대한 대가'라는 점에 대해 공통의 인식이나 양해가 있었다고 보기에 충분하다"고 봤습니다. 신 회장의 롯데가 박 전 대통령과 최씨에게 70억원이라는 K스포츠재단 지원금을 지원한 당시에 △롯데그룹의 월드타워 면세점 특허관련 현안이 존재했고 △박 전 대통령 본인이 면세점 제도의 유지·변경에 직접적 영향을 미칠 권한·지위를 가지고 있었음을 잘 알고 있었으며 △'롯데의 현안'과 대통령의 '요구'가 대가 관계에 있었다는 점을 롯데가 인식한 상태에서 자금 지원이 이뤄졌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신 회장 사건의 재판부는 "피고인(신 회장)이 (박 전 대통령 등의) 강요죄의 피해자라고 해서 대통령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피고인과 롯데그룹의 의사결정의 자유가 없거나 현저히 곤란한 정도에 이르렀다거나 즉시 응해야할 상황이었다고 할 수 없다"면서도 "이번 뇌물공여 범행은 대통령이 먼저 적극적으로 피고인에게 금원 지원을 요구한 것"이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대가를 바라고 돈을 준 것은 잘못이지만, 돈을 주게 된 과정이 시작된 것은 박 전 대통령의 요구 때문이기 때문에 신 회장에게 엄중한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반면 8개월 전에 열린 이 부회장 항소심 선고에서는 결이 다소 다른 판단이 있었습니다. 이 부회장은 미르·K스포츠재단에 대한 출연(영재센터·재단 지원 관련 제3자 뇌물공여)에 대해서는 전부 무죄 판단을 받았습니다. 죄의 성립을 위해 필요한 '부정한 청탁'이 명시적으로도 묵시적으로도 없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이 부회장은 '부정 청탁' 요건을 필요로 하지 않은 단순뇌물공여 사건인 '승마지원'에 대해서만 유죄 판단을 받았을 뿐입니다.

이 부회장 사건을 맡았던 서울고법 형사13부는 △우선 이 부회장의 삼성 경영권 승계라는 삼성의 현안이 당시 존재했다고 볼 수 없고 △청와대 비서실과 금융·시장감독기구가 박 전 대통령에게 올린 보고서가 '삼성 승계' 문제를 다뤘음에도 박 전 대통령이 삼성의 현안을 인식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우며 △이 때문에 승마지원 등 삼성 측의 자금지원과 박 전 대통령의 '직무'와는 아무런 대가관계가 없다고 봤습니다.



아직 신 회장 사건은 상고 여부가 결정되지 않았지만 이 부회장 사건은 지난 2월 항소심 선고가 나온 직후 대법원에 접수돼 심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유사한 구도의 사건에 대한 서울고법의 다른 판단은 대법원에 가서야 최종적으로 결론이 나올 예정입니다.

지금껏 대법원은 '묵시적 청탁'에 대해 상반된 판례를 세운 바 있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의 뇌물 사건에서 대법원은 뇌물 공여 주체인 기업으로부터 청탁 내용이 특정되지 않아도 '포괄적 뇌물죄'를 인정할 수 있다는 취지로 '묵시적 청탁'을 인정한 바 있습니다. 반면 지난해 12월 진경준 전 검사장이 오랜 친구 사이인 김정주 NXC 회장으로부터 수억 원대의 금품을 받은 사건에 대해서는 △진 검 사장과 김 회장 사이의 청탁이 막연하고 추상적인 데다 △두 사람 사이의 금품 수수에서 직무관련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묵시적 청탁'을 부정했습니다.

신 회장과 이 부회장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판단은 향후 수뢰죄와 뇌물공여죄의 구성 요건이 되는 '묵시적 청탁'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세우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추후 대법원 판단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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