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합리한 펀드기준가 산정, 자본시장 발목 잡는다

머니투데이 송정훈 기자 2018.10.05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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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드 기준가격 산정제도 바꿔야-上]펀드기준가 검증절차 없이 공시, 제도 개선 목소리 거세

불합리한 펀드기준가 산정, 자본시장 발목 잡는다


"자본시장에서 자산운용사 펀드 기준가는 공기와 같다. 눈에 보이지 않아 중요성을 못 느끼지만 반드시 필요하다. 공기가 부족하면 사람이 살 수 없듯이 현재의 불합리한 기준가 산정 제도가 바뀌지 않으면 자본시장 발전을 기대하기 힘들다."(한 사무관리회사 대표)

펀드 기준가격 산정제도 개선 목소리가 거세다. 펀드 규모가 600조원에 달할 정도로 성장했지만 정작 핵심업무인 기준가격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밤늦게 산정돼 검증절차 없이 공시하는 관행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펀드 기준가격은 거래단위(좌수)당 실질 자산가치(NAV)를 말한다. 펀드를 사고팔 때(매입과 환매) 적용되는 가격으로 제대로 산출되지 않으면 펀드거래 자체가 불가능한 핵심업무다.

4일 업계에 따르면 현재 펀드 기준가격은 통상 이르면 밤 10~11시 사이, 대부분 자정을 훌쩍 넘겨 산정돼 다음날(익일) 오전 7시 이전에 공시한 후 자산운용사와 수탁회사(은행)가 검증을 거친다.



오후 3시30분 국내 증시 마감 후 당일 펀드 편입자산 종가와 거래내역(미국, 유럽 등 해외펀드는 전일 종가와 거래내역)을 밤늦게까지 시간에 쫓겨 취합해 산정한 후 다음날 오전까지 판매사 영업 개시 전에 공시한 뒤 검증하는 구조다.

자산운용업계 관계자는 "홍콩 선물 등 펀드 편입자산 종가가 시차 등으로 인해 저녁 10시 이후에도 발표되고 거래내역도 오후 10시 이후 잦은 수정이 이뤄진다"며 "이 때문에 기준가격 산정이 시간에 쫓겨 진행되고 산정시간도 계속 길어지는 비정상적인 관행이 바뀌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자산운용사들은 8개 사무관리회사(한국예탁결제원 포함)에 펀드 기준가격 산정 업무를 위탁하고 있다. 펀드 기준가격 산정 근거는 금융투자협회 가이드라인이다. 가이드라인은 당일 오후 7시까지 거래내역과 오후 5시30분까지 알수 있는 종가를 사용해 기준가격을 산정한다.


반면, 다른 국가들은 기준가격을 당일 또는 다음날 오후 6시 전에 산정해 검증을 거쳐 공시하는 체계를 도입하고 있다. 당일 또는 다음날 오후 7시까지 기준가격 산정과 검증, 공시까지 모두 이뤄진다.

펀드산업이 발전한 미국과 일본의 경우 한국처럼 당일 펀드 편입자산 종가와 거래내역을 밤늦게까지 취합하지 않고 당일 특정시간(오후 4시) 기준 시가(일본은 종가)와 거래내역(해외펀드는 각각 당일, 전일종가)을 취합해 기준가를 산정, 검증하고 공시하는 컷오프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영국, 프랑스 등 유럽과 싱가포르, 홍콩, 호주, 말레이시아 등의 경우 아예 당일이 아닌 전날 펀드 편입자산 종가와 거래 내역을 사용해 다음날 오후까지 기준가를 여유있게 산정, 검증을 거쳐 공시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외국과 달리 기준가격을 산정하는 국내 전문인력은 매일 밤 10시에서 자정 이후까지 기준가격을 산정하거나 밤을 새우는 등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다. 열악한 근무 환경에 이탈이 늘어 사무관리회사들은 만성적인 인력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올 들어 한국예탁결제원을 제외한 7개 사무관리회사의 전체 기준가격 산정 담당 인력 이직률이 30~40% 이상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5년 이상 숙련 근무자가 업계를 떠나는 등 전문인력 이탈이 심각한 상황이다.

한 사무관리회사 대표는 "매년 신규 인력 채용을 늘려도 기준가 산정이 가능한 전문인력이 대거 빠져나가면서 정상적인 회사 운영이 어려운 실정"이라고 털어놨다. 그는 "정부가 7월부터 삶의 질 개선을 통한 일자리 창출과 경제 활성화를 위해 주 52시간 근무제를 시행했지만 기준가 산정 임직원에겐 그림의 떡"이라고 하소연했다.

이 같은 문제는 국내 펀드 기준가격 오류가 증가하는 부작용으로 이어지고 있다. 국내 펀드 기준가격 오류는 2014년 132건에서 지난해 711건으로 579건(440%) 급증했다. 3년 동안 5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연도별로는 △2015년 180건 △2016년 201건 등으로 매년 증가세다.

이는 결국 펀드산업은 물론 자본시장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펀드 기준가격이 잘못 산정돼 매매가 이뤄져 투자자 손실이 발행하면 손해배상으로 이어져 귀책사유가 있는 사무관리회사는 물론 자산운용사, 수탁회사의 손해배상에 따른 수익성 악화는 물론 자본시장 자체에 대한 신뢰도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펀드 기준가격 업무를 담당하는 한 임원은 "펀드 투자자는 기준가격이 실제보다 높게 산정되면 매입 시, 낮게 산정되면 환매 시 그만큼 손실을 볼 수 밖에 없다'며 "현재와 같은 기준가격 산정이 이어지면 오류가 꾸준히 늘면서 귀책사유에 따라 손해배상 규모도 커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는 "이 때문에 관련 회사의 손해배상이 늘어 수익성 악화로 이어지는 것은 물론 투자자의 펀드 시장에 대한 불신을 초래하고 신뢰도를 떨어뜨려 자본시장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며 개선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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