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백두산 포수에서 독립전쟁 선봉장으로

머니투데이 권경률 칼럼니스트 2018.09.08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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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91 – 홍범도 : 독립전쟁 이끌고 이국에 잠들다

홍범도, 백두산 포수에서 독립전쟁 선봉장으로


“홍대장이 가는 길에는 일월이 명랑한데 / 왜적 군대 가는 길에는 비가 내린다 /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 오연발 탄환에는 군물이 돌고 / 화승대 구심에는 내굴이 돈다 /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1908년경에 함경도 사람들이 부르던 ‘날으는 홍범도가(歌)’다. 당시 홍범도가 지휘한 의병부대는 삼수갑산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해 일본군을 상대로 신출귀몰한 유격전을 펼쳤다. 홍범도 부대는 연전연승을 거듭했고 일본군은 그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심지어 아내와 큰아들을 인질로 쓰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백두산 호랑이’를 막을 수 없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는 바로 그 홍범도를 떠올리게 하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주인공 고애신의 스승, 장포수다. 그는 산짐승을 사냥하는 포수요, 일본군과 맞서 싸우는 의병이다. 1868년 평양에서 태어난 홍범도 또한 삼수갑산, 즉 백두산 일대를 누빈 포수였다. 그것도 출중한 사격술을 인정받아 산포수 조직인 ‘안산사포계(安山社砲契)’를 이끌던 대장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의병의 길로 접어들었을까?

1907년 일제는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삼아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이른바 ‘정미7조약’을 체결했다. 마음대로 법령을 발동하고 행정조치를 취할 수 있게 되자, 그들은 우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고 한국인의 무장을 해제하려고 했다. ‘총포와 화약류 단속법’을 만든 것도 그 일환이었다. 산포수들은 생업 수단인 총을 내놓아야 했다. 홍범도는 이를 거부하고 동료들과 함께 항일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람 잘못 건드렸다. 홍범도의 지휘능력은 유학자 의병장들과 차원이 달랐다. 그는 누구보다 총을 잘 다뤘으며 부하들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하기는 백두산에서 호랑이를 사냥하던 그 실력이 어디 가겠는가. 예로부터 사냥이 군사훈련으로 쓰인 것도 그래서다. ‘준비된 의병’ 홍범도 부대는 1907~1908년에 일본군과 37회나 싸웠다. 광부, 해산군인, 화전민 등이 합류하면서 병력도 1천 명에 육박했다.

1910년 나라가 완전히 일본에 넘어가자 홍범도는 국경을 넘어 연해주와 간도에서 부대를 정비하고 때를 기다렸다. 1919년 조선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떨친 3.1운동의 여파로 만주 일대에서 한국 독립군 부대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홍범도 역시 ‘대한독립군’을 조직하고 국내로 진입해 유격작전을 펼쳤다. 이를 묵과할 수 없었던 일본군은 두만강을 건너 중국 땅까지 추격에 나섰다.

1920년 6월 7일 길림성 봉오동 계곡에 일본군 19사단 소속 월강추격대가 나타났다. 인원 300여 명에 훈련이 잘 돼있고 최신무기를 갖춘 정규군이었다. 그네들이 볼 때 독립군은 형편없는 오합지졸이었을 것이다. 자신만만한 일본군은 험준한 산악지대를 거침없이 진군했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산중에 매복한 홍범도는 범의 눈으로 지켜보았다.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독립군은 뜨거운 맛을 보여주기 위해 골짜기마다 병력을 숨겨 놓았다.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을 필두로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안무의 국민회군, 이흥수의 대한신민단군 등이 연합부대를 꾸려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봉오동의 아침은 긴장감으로 팽팽히 부풀어 올랐다.
이 계곡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면 지형의 이점이 큰 천연요새였다. 일본군이 멋도 모르고 매복지대로 들어서자 독립군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우거진 산림에서 쏟아지는 탄환에 적병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반격을 가하고 싶어도 총탄이 어디서 날아오는지 종잡을 수 없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결국 월강추격대는 처참한 패배를 맛보았다. 병사 157명이 사살 당했고, 나머지도 대부분 부상을 입었다. 반면 독립군 측의 피해는 전사 4명, 중상 2명에 그쳤다. 봉오동전투는 한국 독립군 연합부대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그것은 일제강점기에 일본군과의 정규전에서 처음으로 승리를 거둔 쾌거였다.

이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나가며 항일무장투쟁의 기세를 북돋웠다. 일제는 이른바 ‘간도 불령선인 초토계획’을 세워 독립군 소탕을 도모했다. 간도는 두만강과 압록강의 건너편으로 조선과 인접한 남만주 지역이다. 19세기 후반부터 한국인들이 대거 이주해 정착했다. 일제의 음모는 곧 실행에 옮겨졌다.

1920년 10월 일본 측에 매수된 중국 마적단이 훈춘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고 일본인 13명을 살해했다. 이 자작극을 빌미로 일제는 직접 마적을 토벌하겠다며 2만 대군을 편성해 중국 영토인 간도를 무단으로 침범했다. 한국 독립군 부대들은 민간인 피해를 우려해 백두산 부근 산악지대로 이동했다.

1920년 10월 21일 5천 명 규모의 일본군 대부대가 청산리 계곡으로 밀고 들어왔다. 대포와 중화기로 무장한 정예부대였다. 2천여 명의 독립군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가 지휘하는 연합부대로 나눠 적을 상대했다. 전투는 백운평에 매복한 북로군정서가 일본군 선봉대를 격파하면서 불붙었다.

교전은 26일까지 계속되었다. 백운평에 이어 완루구, 천수평, 어랑촌, 맹개골, 만기구, 쉬구, 천보산 등지에서 독립군은 일본군을 섬멸했다. 물론 전력이 크게 밀리다 보니 위기의 순간도 찾아왔다.

어랑촌에서는 김좌진 부대가 중과부적으로 고전했다. 고지를 차지하고 조준사격을 했지만 일본군은 악착같이 밀고 올라왔다.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이어지는 가운데 가뭄의 단비처럼 구원군이 나타났다. 홍범도의 연합부대가 완루구에서 적군을 물리치고 어랑촌으로 달려온 것이다. 앞뒤로 독립군을 맞게 된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이 6일간의 싸움이 바로 한국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청산리대첩이다. 독립군 부대들은 서로 힘을 모아 큰 승리를 일궈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일본군의 인명 손실은 전사자 1천200여 명, 부상자 2천1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것은 독립전쟁의 숨통을 틔우는 통렬한 승전보였다. 조선 독립을 쟁취하려면 일제와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고 독립지사들이 부르짖었지만 사실 의구심이 적지 않았다. 청나라와 러시아를 물리치고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일제였다. ‘천하무적’ 일본군을 과연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을까? 하지만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독립군은 이길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그 선봉에 ‘백두산 호랑이’ 홍범도가 있었다.

참패를 당한 일제는 비열하게도 민간인들에게 보복했다. 간도 전역의 한국인 촌락들을 습격하여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이고 가옥, 학교, 교회들을 불태웠다. 이를 ‘경신참변’이라고 부른다. 경신참변의 실상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만큼 잔혹했다. 일본군은 한국인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사격연습 하듯 총을 쏘아대는 광란극을 연출했다.

민간인 피해가 커지자 독립군 부대들은 북만주를 거쳐 1921년 러시아 연해주로 들어갔다. 공산혁명으로 집권한 볼셰비키의 원조 속에 힘을 기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자유시(현 스보보드니)에 도착한 한국 독립군은 현지 공산당 무장단체들의 내분에 휘말렸다. 독립군 전사들은 러시아 적군의 공격을 받고 목숨을 잃거나 포로가 되었다. ‘자유시참변’은 독립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홍범도는 이후 연해주의 집단농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조선유격대 원로 대우를 받으며 한국인 권익 보호에 앞장선 삶이었다.

1937년 그는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로 떠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20만 명의 한국인들이 당의 일방적인 지시로 이곳저곳 떠도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노인과 아이들이 병들고 지쳐서 쓰러지면 눈 속에 묻고 길을 재촉해야 했다.

홍범도가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은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였다. 고려인 극장의 경비를 서거나 표를 팔며 이 소도시에서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1943년 그는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홍범도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를 추서했다. ‘백두산 호랑이’는 지금 크질오르다 중앙묘역에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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