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연금술사'…박항서는 여전히 배고프다

머니투데이 유승목 기자 2018.08.29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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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인도네시아 브카시 패트리엇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남자 축구 8강전 베트남과 시리아의 경기. 베트남 박항서 감독이 작전 지시를 하고 있다./사진제공=뉴시스27일 인도네시아 브카시 패트리엇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남자 축구 8강전 베트남과 시리아의 경기. 베트남 박항서 감독이 작전 지시를 하고 있다./사진제공=뉴시스


"우리가 지금까지 얻은 것을 즐기고 싶다. 기적이 계속되든, 아니든 기다려보라."




지난 1월 중국 창저우에서 열린 2018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챔피언십에서 베트남을 사상 첫 결승에 올려놓은 박항서 감독이 한 말이다. 박 감독이 눈보라가 휘날리는 겨울에 일군 베트남 축구의 기적은 푹푹 찌는 한 여름에도 아직 유효하다. 이번에는 아시안게임이다.

◇베트남은 '박항서 앓이' 중= '박항서 매직'이 베트남을 뒤흔들고 있다. 박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남자 축구 대표팀은 지난 27일 인도네시아 브카시 패트리어트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시리아에 1대0 승리를 거두며 4강에 진출했다.



하나로 똘똘 뭉친 베트남 선수들은 '악바리'처럼 공을 향해 달려들었다. 객관적인 열세에도 시종일관 대등한 경기를 펼치더니 연장 후반 응우옌 반 토안이 천금같은 결승골을 뽑아내며 시리아를 꺾었다. 그동안 본선 진출도 힘들었던 베트남이 당당히 메달 후보로 이름을 올렸다. 베트남이 아시안게임에서 거둔 성적은 16강이 최고였다.

예상치 못한 승전보에 베트남 전역은 열광의 도가니다. 베트남 언론과 각종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는 박항서 감독과 베트남 축구팀에 대한 칭찬 일색이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도 박항서를 연호하고 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박항서 앓이' 중이다. 응우옌 쑤엉 푹 베트남 총리까지 박 감독과 베트남 선수들에게 축하인사를 전했다. 베트남의 한 매체는 선수단에 거액의 보상을 약속하기도 했다.

사실 베트남은 이번 아시안게임을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지난 1월 U-23 아시안컵에서 준우승이라는 믿기 어려운 기적을 이룩했지만 베트남 스스로도 아직 아시안게임 메달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고액의 중계권료 부담까지 겹치자 베트남 방송들은 베트남의 조별예선을 중계하지 않았다. 하지만 강호 일본까지 꺾는 등 3연승을 질주하며 16강에 진출하자 황급히 중계를 시작했다. 16강부터 중계된 '박항서와 아이들'의 열정은 결국 하노이를 불태웠다.


지난 27일(현지시간) 인도네시아 브카시 패트리어트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남자 축구 8강전에서 베트남이 시리아를 1대0으로 꺾은 가운데 박항서 감독과 베트남 대표팀 선수들이 승리의 기쁨을 나누고 있다. /사진제공= 뉴스1지난 27일(현지시간) 인도네시아 브카시 패트리어트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남자 축구 8강전에서 베트남이 시리아를 1대0으로 꺾은 가운데 박항서 감독과 베트남 대표팀 선수들이 승리의 기쁨을 나누고 있다. /사진제공= 뉴스1
◇베트남에서 피운 꽃= 오랜 시간 축구 변방인 아시아에서도 별 볼일 없던 팀이었다가 최근 주목받기 시작한 베트남 축구는 박 감독이 걸어온 길과 꼭 닮았다. 1981년 실업팀에서 경력을 시작해 1984년 럭키금성에서 프로 무대에 데뷔한 박항서는 주목받는 선수가 아니었다. '악바리'로 불리며 성인대표팀에 발탁되기도 했지만 1988년 일찌감치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은퇴 후 지도자 생활도 비슷했다. 1996년 FC 서울의 전신인 LG 치타스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해 2002년 거스 히딩크 감독을 밑에서 월드컵 4강 신화에 조력했지만 그뿐이었다. 히딩크 감독의 뒤를 이어 대표팀 감독에 올랐지만 3개월 만에 경질됐고 2005년 경남 FC 감독을 시작으로 프로팀 지휘봉을 잡았지만 눈에 띄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 결국 지난해 내셔널리그(3부리그) 창원시청을 끝으로 잊혀지는 듯했다.

박 감독이 선택한 길은 축구 변방 베트남이었다. 누구보다 박 감독의 열정을 잘 아는 부인 최상아씨가 박 감독에게 새로운 도전을 권유한 것. 이를 받아들인 박 감독은 환갑이 다 된 나이에 97세 노모와 부인을 한국에 두고 베트남으로 향했다. 특유의 악바리 정신과 축구에 대한 농익은 열정으로 무장한 박감독의 '노익장'은 부임 3개월 만에 베트남 U-23 대표팀을 아시아 정상권으로 올려놓았다.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한국대표팀 김학범 감독(왼쪽)과 베트남 대표팀 박항서 감독이 결승 티켓을 두고 29일 격돌한다./사진제공=뉴스1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한국대표팀 김학범 감독(왼쪽)과 베트남 대표팀 박항서 감독이 결승 티켓을 두고 29일 격돌한다./사진제공=뉴스1
아시안게임 메달이 가시권에 놓인 박 감독은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있다. 바로 4강 상대가 아시안게임 유력 금메달 후보인 '조국' 대한민국이기 때문. 맞수인 김학범 감독도 본인이 인정하는 오랜 동료라 심경이 복잡하다.

하지만 박 감독은 누구보다 스스로 해야 할 일을 알고 있다. 8강전을 마친 뒤 박 감독은 "내 조국은 대한민국이고 조국을 사랑한다. 하지만 현재 베트남 대표팀 감독이다. 책임과 임무를 다하겠다"라고 출사표를 던졌다. 이같은 박 감독의 모습에서 "나는 아직 배고프다"라고 외친 히딩크 감독이 오버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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