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자반은 "아니, 이건 술이 아니냐. 치워라"고 했다. 전투 중에 술을 마실 순 없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곡양은 "술이 아닙니다"라며 마실 것을 종용했다. 사마자반은 못 이기는 척 받아마셨다. 원래 사마자반은 술을 좋아했다. 일단 술을 맛보니 입에서 뗄 수가 없었다. 결국 사마자반은 취할 정도로 마시고 말았다.
공왕은 그대로 돌아와 말했다. "오늘 싸움에서 나는 부상을 입었다. 이제 믿을 사람은 사마자반 장군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마자반은 이렇게 취했으니 이는 초나라의 사직을 망각하고 우리의 백성을 전혀 돌볼 생각이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나는 이제 다시 싸울 기력이 없다." 그리고는 군대를 철수시키고 돌아가 사마자반의 목을 베어 저잣거리에 내걸었다.
모든 충성이 '윗분'에게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다. 때론 충심에서 우러나온 행동이 윗분에게 해가 되기도 한다. '작은 충성'이 '큰 불충'되는 셈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그의 참모였던 법원행정처 간부들이 한 행동이 그런 경우다.
양 전 대법원장은 역대 미국 연방대법원장 가운데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를 가장 존경한다고 했다. 미국의 대통령과 연방대법원장을 모두 지낸 인물이다. 우리에겐 가슴 아픈 역사인 1905년 미국과 일본 간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태프트가 바로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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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육군장관이었던 태프트를 일본에 급파,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와 조약을 맺게 했다. 미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권을 인정하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는 내용이다. 1910년부터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은 건 그 때문이다.
루스벨트의 뒤를 이어 1909년 대통령이 된 태프트는 퇴임 후 1921년 연방대법원장에 오른다. 연방대법원장 시절 그가 이룬 성과가 '상고허가제 도입'이다. 웬만한 사건은 주 대법원이 맡고 연방대법원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건의 상고심만 다루도록 한 것이다. 이를 통해 미국 연방대법원은 사건의 홍수에서 벗어나 핵심 사건만 처리하는 '정책법원'의 위상을 굳히게 됐다.
양 전 대법원이 태프트를 존경한 건 이 대목에서다. 상고허가제는 양 전 대법원장의 '꿈'이었다. 그러나 여론 때문에 불가능했다. 대법원이 본인 사건의 재판을 거부하는 걸 누가 반기겠나? 그러자 양 전 대법원장이 대신 꺼내든 게 상고법원이다. 임종헌 전 차장 등 법원행정처 간부들은 양 전 대법원장의 숙원 '상고법원 도입'을 지상과제로 삼았다. 이를 위해 재판거래도 서슴지 않았다.
박근혜 청와대의 호감을 사려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법외노조 처분 재판에 개입한 건 빙산의 일각이다. 상고법원 도입 법안을 다룰 국회의원들을 구워삶으려고 그들의 개인 재판 전략을 짜주기도 했다. 심판 역할을 해야 할 법원이 재판 당사자의 코치 노릇을 했다. 이들의 '작은 충성' 때문에 그들이 모신 '주군' 양 전 대법원장은 검찰의 수사를 받을 처지에 놓였다. 하지만 그게 모두 참모들의 책임일까? '작은 충신'과 '큰 충신'을 구분 못한 주군 역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