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자의 체헐리즘]'꽃무늬 양산', 남자도 써봤다

머니투데이 남형도 기자 2018.08.18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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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 전유물 '양산' 땡볕에 써보니…양산 속 3도↓, 땀 줄줄 났었는데 "훨씬 낫네"

편집자주 수습기자 때 수동 휠체어를 직접 타고 서울시내를 다녀본 적이 있습니다. 장애인들 심정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생전 보이지 않던, 불편한 세상이 처음 펼쳐졌습니다. 뭐든 직접 해보니 다르더군요. 그래서 체험하고 깨닫고 알리는 기획 기사를 매주 써보기로 했습니다. 이름은 '체헐리즘' 입니다. 제가 만든 말입니다. 체험과 저널리즘(journalism)을 하나로 합쳐 봤습니다. 사서 고생한단 마음으로 현장 곳곳을 몸소 누비고 다니겠습니다. 깊숙한 이면의 진실을 전달하겠습니다. 소외된 곳에 따뜻한 관심을 불어넣겠습니다.
서울 광화문 한복판서 꽃무늬 양산(장모님 협찬)을 쓴 기자. 양산을 거의 처음 쓰는터라 요령이 부족해, 등쪽에 고스란히 햇빛을 받고 있다. 반면 양산을 뒤쪽까지 안정적으로 가리고 있는, '양산쓰기 만렙'인 왼쪽 행인들./사진=남궁민 기자서울 광화문 한복판서 꽃무늬 양산(장모님 협찬)을 쓴 기자. 양산을 거의 처음 쓰는터라 요령이 부족해, 등쪽에 고스란히 햇빛을 받고 있다. 반면 양산을 뒤쪽까지 안정적으로 가리고 있는, '양산쓰기 만렙'인 왼쪽 행인들./사진=남궁민 기자




낮 12시, 점심 무렵이었다. 서울 광화문 횡단보도서 신호를 기다렸다. 갑자기 말복(末伏) 햇볕이 강하게 내리쬤다.
자비 따윈 없었다. 그늘인줄 알고 속았던 이들은 희생양이 됐다. 오전 내내 시달렸을, 가뜩이나 배고플 직장인들 미간이 찌푸려졌다. 머리를 손쉽게 점령한 열기는 얼굴로, 목과 등으로, 다리로 퍼졌다. 섭씨 36도 햇볕에 익어가던 이들은 온몸으로 눈물을 흘렸다.

이때, 몇몇 여성들이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양산' 이었다. 이들은 익숙한듯 양산을 비스듬히 기울여 등까지 가렸다. 금세 그늘이 생겼다. 반면 남성들은 속수무책(손을 묶인 듯 방법이 없어 꼼짝 못하게 된다는 뜻)이었다. 기껏해야 손으로, 좀 더 머리 써서 서류철로 햇볕을 가렸다. 30명에 달하는 남성 직장인들 중 양산은 커녕, 우산 든 이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암묵적인 약속이라도 한듯 했다. '더워도 남자는 양산은 쓰지마라, 왠지 부끄럽다.'

그래서 맨 앞으로 갔다. 보란듯 '꽃무늬 양산'을 펼쳤다. 무려 '원터치 자동 양산'이었다. '촥' 하는 소리와 함께 한 번에 펴졌다. 마치 무언(無言)의 외침 같았다. '남자들도 솔직히 덥지 않느냐, 양산을 쓰자'는. 옆에 양산 쓴 여성이 잠시 쳐다보다 시선을 거뒀다. 건너편에서 오던 남성 직장인 한 명은 눈초리가 매서웠다. 왠지 '남자가 한심하게'란 눈빛이었다.(물론 자격지심일 수도 있다) 그래도 꿋꿋이, 끝까지 무사히 건넜다. 머리털 나고 처음 쓴 양산이었다.



지난주 체헐리즘 기사(커피, 1년간 끊어봤다) 댓글을 통해 제보를 받았다. 한 독자가 기자에게 '꽃무늬 양산을 써보라'고 권하고 있다. 감사의 뜻을 담아 '빨간색 하트'를 그려 보았다./사진=댓글 화면 캡쳐지난주 체헐리즘 기사(커피, 1년간 끊어봤다) 댓글을 통해 제보를 받았다. 한 독자가 기자에게 '꽃무늬 양산을 써보라'고 권하고 있다. 감사의 뜻을 담아 '빨간색 하트'를 그려 보았다./사진=댓글 화면 캡쳐
양산을 쓰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지난주 '체헐리즘' 기사 댓글을 통해 제보를 받았었다. 아이템이 없어 구걸한 건 아녔다. 독자와 소통 차원이었다. 그때 한 독자(아이디: putt****)가 '남자가 꽃무늬 양산 쓰고 돌아다니기 해주세용~'이라고 남겼다. 처음엔 '내가 언젠가 잘못한 적이 있는 사람인가, 왜 이러지' 했다. 그러다 문득 좋은 아이디어란 생각이 들었다. 추천 하나를 누른 뒤, 수첩에 넙죽 적었다.

이유는 이랬다. '편견 타파'가 필요할 것 같았다. 올해 40도 육박하는 폭염을 겪으며 난생 처음 양산을 쓰고 싶단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주저하며 한 번도 못 썼다. 왠지 여성들만 쓰는 거란 생각이 있었다. 갖고 다니기 귀찮기도 했다. 그런데 이웃나라 일본 사이타마(埼玉)현 등에선 '남성도 양산 쓰기' 운동에 돌입했단 소식이 들렸다. 광복 73주년인데 질 수 있나. 실제 한 번 써보면 어떨까 싶었다.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도 궁금했다.

장모님이 운동 가실 때 드는 양산 2종 세트. 레이스와 꽃무늬 중 뭘 들까 고민하다 '꽃무늬 양산'으로 택했다./사진= 남형도 기자장모님이 운동 가실 때 드는 양산 2종 세트. 레이스와 꽃무늬 중 뭘 들까 고민하다 '꽃무늬 양산'으로 택했다./사진= 남형도 기자
양산부터 구해야 했다. 당연히 한 번도 사본 적이 없었다. 아내 양산은 꽃무늬가 아녔다. 독자와 약속을 지켜야 했다. 장모님 협찬으로 겨우 구했다. 검은색 바탕에, 분홍·노랑·파랑 꽃들이 알록달록 어우러진 문양이었다. 그날 밤, 가방에 양산을 비장하게 꽂아 넣었다. 13일 출근길부터 쓰기로 맘 먹었다.

그런데 막상 아침이 되니 뽑는 것도 쉽잖았다. 밤엔 감성이, 아침엔 이성이 앞선다고 했던가. 이런저런 핑계를 만들었다. 13일엔 '오늘은 왠지 구름이 많아', 14일엔 '해가 더 쨍쨍 났으면 좋겠어', 15일엔 '오늘은 쉬는 날인데'라고 했다. 사실 쓰기 쪽팔린 거였다. 16일, 해가 쨍쨍나는 말복이 되서야 양산을 뽑았다. '토르 망치'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이날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체험했다.

꽃무늬 양산을 들고 광화문광장을 걷고 있는 기자. 양산이 다소 작았지만 더위를 피하기엔 충분했다. 후배 기자에게 음료 한 잔을 사준 뒤 사진을 찍도록 시켰다. /사진=남궁민 기자꽃무늬 양산을 들고 광화문광장을 걷고 있는 기자. 양산이 다소 작았지만 더위를 피하기엔 충분했다. 후배 기자에게 음료 한 잔을 사준 뒤 사진을 찍도록 시켰다. /사진=남궁민 기자
우선 양산만 썼을 때 효과를 살펴봤다. 광화문광장으로 향했다. 햇볕을 피할 곳 하나 없었다. 삼삼오오 서 있던 의경들도 더운지 파란색 햇빛가리개용 우산을 쓰고 있었다. '나만 쓰는 게 아니다' 위안이 됐다.

양산을 펼치자마자 금방 체감이 됐다. 평소 안 썼던 터라 더 그랬다. 그늘이 생기니 햇빛에 오만상을 찌푸렸던 얼굴이 펴졌다. 불필요한 '못생김'을 한결 덜 수 있었다. 그 다음은 땀이었다. 보통 조금만 걸어도 얼굴에서 땀이 줄줄 흘렀었다. 그런데 양산을 펼치니 땀이 별로 안 났다. 송글송글 맺히긴 했지만 괜찮았다. 손수건을 꺼내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불쾌지수가 한결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양산을 썼을 때와 쓰지 않았을 때를 좀 더 상세히 비교해보기로 했다. 역시 햇볕이 강한 청계천으로 향했다. 여기도 다리 외엔 그늘이 아예 없었다. 폭염이라 인적이 드물었다.

양산 없이 온도를 쟀을 때(왼쪽, 36도)와 양산을 쓴 뒤 온도를 쟀을 때(오른쪽, 33도) 비교. 체감온도는 8도 정도 차이난다고 한다./사진=남형도 기자양산 없이 온도를 쟀을 때(왼쪽, 36도)와 양산을 쓴 뒤 온도를 쟀을 때(오른쪽, 33도) 비교. 체감온도는 8도 정도 차이난다고 한다./사진=남형도 기자
온도를 먼저 재봤다. 양산 밑에 온도계를 놓고 재니 섭씨 33도였다. 이어 양산을 걷고 재니 섭씨 36도까지 올랐다. 양산을 쓰는 것만으로도 3도가 더 떨어질 수 있는 것. 체감 온도는 더 크게 떨어질 터였다.

각각 10분씩 걸은 뒤 비교해보기로 했다. 양산을 안 쓰고 먼저 걸어봤다. 해가 남중고도에 있어, 머리 위쪽에서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불과 2분 만에 이마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5분 정도 지나니 땀방울이 얼굴에서 흘렀고, 팔목에도 땀방울이 맺혔다. 바지도 축축해진 느낌이었다. 7분이 지나니 셔츠 등쪽 가운데가 젖었다. 뒷목에선 땀이 계속해서 흘렀다. 10분이 지나니 온몸이 달궈졌다. 콧잔등에선 땀이 계속 흘러 안경이 미끄러졌다. 불쾌해졌다. 빨리 그늘로 가고 싶었다.

양산을 안 쓰고 청계천을 10분간 걸었을 때 흘린 땀. 얼마나 더운지 보여줄 방법이 없어 불가피하게 셀프로 등의 땀을 찍었다./사진=남형도 기자양산을 안 쓰고 청계천을 10분간 걸었을 때 흘린 땀. 얼마나 더운지 보여줄 방법이 없어 불가피하게 셀프로 등의 땀을 찍었다./사진=남형도 기자
청계천 장통교 밑에서 쉬며 땀을 말렸다. 이어 양산을 쓰고 걸었다. 햇빛을 막은 것만으로도 온도가 내려간 것을 느꼈다. 양산을 만져보니 뜨거웠다. 이 햇빛을 온몸으로 맞고 있었던 것. 3분이 지난 뒤 이마를 만져봤지만 땀은 흐르지 않았다. 7분이 흐르니 이마에 땀이 한 줄기 흘렀다. 그래도 견딜만 했다. 등에도 땀방울이 맺혔지만, 흥건히 젖진 않았다. 콧잔등도 땀이 없었다. 10분이 지나도 땀이 전체적으로 흐르진 않았다. 더위가 느껴지는 정도였다.

양산은 확실히 더위 차단에 효과가 있었다. 체감 온도 차이가 8도에 이른다고 한다. 특히 횡단보도처럼 장시간 서 있어야 할 땐 빛을 발했다. 햇볕 속에서도 스마트폰을 잘 볼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누군가에게 씌워줄 수도 있다. 밝기를 높이지 않아도 잘 보였다. 다만 양산 크기는 등까지 가릴 수 있게끔 충분히 큰 게 좋을 것 같았다. 또 바람이 불 때 쉽게 뒤집히는 점은 아쉬웠다.

점심식사를 할 때도 양산을 옆에 올려 놓았다. 자주 물건을 흘리고 다니는지라 걱정이 됐다./사진=남형도 기자점심식사를 할 때도 양산을 옆에 올려 놓았다. 자주 물건을 흘리고 다니는지라 걱정이 됐다./사진=남형도 기자
이번엔 남성이 양산을 쓰는 것에 대한 인식을 알아보고 싶었다. 청계천에서 15분 남짓 떨어진 명동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만난 남성들 100명 중 양산 쓴 이는 단 2명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양산보단 우산에 가까워보였다. 반면 여성들은 양산을 쓴 이들이 자주 보였다.

꽃무늬 양산을 쓰고 당당히 걸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쳐다보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 보진 않았다. 여성들은 남성들의 양산 사용에 대해 정작 신경을 안 쓴다는 응답이 많았다. 직장인 이다혜씨(27)는 "남성들도 더운 건 마찬가지일텐데, 양산을 써도 상관 없다고 생각한다. 크게 신경 안 쓴다"고 했고, 직장인 박수진씨(31)도 "남성들 스스로 양산을 쓰면 부끄럽다 여기는 것 같다"며 "요즘엔 양산과 우산 겸용 제품도 많은데, 그런 걸 쓰면 좋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오히려 여성보단 남성이 더 많이 쳐다보는 느낌이었다. 서울시청 인근서 남성 직장인 세 명 중 한 명이 쳐다봤다. 그러자 옆에 있던 남성 직장인 두 명도 고개를 뒤로 돌려 빤히봤다.

명동 인근 백화점 지하 한 양산 매장. 형형색색 양산들이 있지만 대다수 여성용 양산들이다. 남성 취향이 맞는 양산 종류는 많지 않았다./사진=남형도 기자명동 인근 백화점 지하 한 양산 매장. 형형색색 양산들이 있지만 대다수 여성용 양산들이다. 남성 취향이 맞는 양산 종류는 많지 않았다./사진=남형도 기자
이들에게 다가가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직장인 이희수씨(37)는 "남자들이 양산을 잘 안 쓰고 다니는데, 여성스런 양산을 썼길래 쳐다봤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직장인 박정환씨(35)도 "아직까진 여성들 소품이란 인식이 강하다"며 "그래도 요즘은 가끔씩 양산 쓴 남자들이 보인다"고 말했다. 직장인 김모씨(34)는 "사실 요즘처럼 더울 땐 체면이고 뭐고 쓰고 싶은 생각도 든다"며 "양산쓰니 시원해보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세 명 모두 "그래도 양산을 가지고 다니며 쓸 생각은 없다"고 일축했다.


이 같은 편견은 양산 매장에서도 잘 드러났다. 명동 인근 백화점 지하에 위치한 양산 매장 4곳을 찾았다. 1곳엔 아예 남성용 양산이 없었고, 나머지 3곳도 남성용 양산 종류는 3~4개에 불과했다. 전체 99%는 여성용 양산이었다. 기자가 든 것처럼 꽃무늬거나, 화려하고 밝거나, 레이스가 달린 게 많았다. 대부분 여성 취향을 고려해 만들어진 제품이었다. 남성용 양산을 달라고 하니, 주로 무늬가 아예 없는 검은색·남색 양산을 권했다.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양산 매장 관계자는 "그래도 요즘 남자들도 양산을 많이 찾는다"며 "특히 머리 보호가 필요한 나이든 분들이 양산을 사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양산 매장서 잘 고르는 팁도 얻었다. 좋은 양산은 △자외선 차단율이 높은 것(보통 95%, 높게는 99.9%도 있었음) △코팅, 암막 처리가 된 것(햇볕을 더 잘 막아주고 눈부심이 덜 함) △천이 두꺼운 것 △가벼운 것 △어두운 것(밝은 것보다 자외선 차단율이 높음)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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