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 한복판서 꽃무늬 양산(장모님 협찬)을 쓴 기자. 양산을 거의 처음 쓰는터라 요령이 부족해, 등쪽에 고스란히 햇빛을 받고 있다. 반면 양산을 뒤쪽까지 안정적으로 가리고 있는, '양산쓰기 만렙'인 왼쪽 행인들./사진=남궁민 기자
이때, 몇몇 여성들이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양산' 이었다. 이들은 익숙한듯 양산을 비스듬히 기울여 등까지 가렸다. 금세 그늘이 생겼다. 반면 남성들은 속수무책(손을 묶인 듯 방법이 없어 꼼짝 못하게 된다는 뜻)이었다. 기껏해야 손으로, 좀 더 머리 써서 서류철로 햇볕을 가렸다. 30명에 달하는 남성 직장인들 중 양산은 커녕, 우산 든 이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암묵적인 약속이라도 한듯 했다. '더워도 남자는 양산은 쓰지마라, 왠지 부끄럽다.'
지난주 체헐리즘 기사(커피, 1년간 끊어봤다) 댓글을 통해 제보를 받았다. 한 독자가 기자에게 '꽃무늬 양산을 써보라'고 권하고 있다. 감사의 뜻을 담아 '빨간색 하트'를 그려 보았다./사진=댓글 화면 캡쳐
장모님이 운동 가실 때 드는 양산 2종 세트. 레이스와 꽃무늬 중 뭘 들까 고민하다 '꽃무늬 양산'으로 택했다./사진= 남형도 기자
그런데 막상 아침이 되니 뽑는 것도 쉽잖았다. 밤엔 감성이, 아침엔 이성이 앞선다고 했던가. 이런저런 핑계를 만들었다. 13일엔 '오늘은 왠지 구름이 많아', 14일엔 '해가 더 쨍쨍 났으면 좋겠어', 15일엔 '오늘은 쉬는 날인데'라고 했다. 사실 쓰기 쪽팔린 거였다. 16일, 해가 쨍쨍나는 말복이 되서야 양산을 뽑았다. '토르 망치'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이날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체험했다.
꽃무늬 양산을 들고 광화문광장을 걷고 있는 기자. 양산이 다소 작았지만 더위를 피하기엔 충분했다. 후배 기자에게 음료 한 잔을 사준 뒤 사진을 찍도록 시켰다. /사진=남궁민 기자
양산을 펼치자마자 금방 체감이 됐다. 평소 안 썼던 터라 더 그랬다. 그늘이 생기니 햇빛에 오만상을 찌푸렸던 얼굴이 펴졌다. 불필요한 '못생김'을 한결 덜 수 있었다. 그 다음은 땀이었다. 보통 조금만 걸어도 얼굴에서 땀이 줄줄 흘렀었다. 그런데 양산을 펼치니 땀이 별로 안 났다. 송글송글 맺히긴 했지만 괜찮았다. 손수건을 꺼내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불쾌지수가 한결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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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을 썼을 때와 쓰지 않았을 때를 좀 더 상세히 비교해보기로 했다. 역시 햇볕이 강한 청계천으로 향했다. 여기도 다리 외엔 그늘이 아예 없었다. 폭염이라 인적이 드물었다.
양산 없이 온도를 쟀을 때(왼쪽, 36도)와 양산을 쓴 뒤 온도를 쟀을 때(오른쪽, 33도) 비교. 체감온도는 8도 정도 차이난다고 한다./사진=남형도 기자
각각 10분씩 걸은 뒤 비교해보기로 했다. 양산을 안 쓰고 먼저 걸어봤다. 해가 남중고도에 있어, 머리 위쪽에서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불과 2분 만에 이마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5분 정도 지나니 땀방울이 얼굴에서 흘렀고, 팔목에도 땀방울이 맺혔다. 바지도 축축해진 느낌이었다. 7분이 지나니 셔츠 등쪽 가운데가 젖었다. 뒷목에선 땀이 계속해서 흘렀다. 10분이 지나니 온몸이 달궈졌다. 콧잔등에선 땀이 계속 흘러 안경이 미끄러졌다. 불쾌해졌다. 빨리 그늘로 가고 싶었다.
양산을 안 쓰고 청계천을 10분간 걸었을 때 흘린 땀. 얼마나 더운지 보여줄 방법이 없어 불가피하게 셀프로 등의 땀을 찍었다./사진=남형도 기자
양산은 확실히 더위 차단에 효과가 있었다. 체감 온도 차이가 8도에 이른다고 한다. 특히 횡단보도처럼 장시간 서 있어야 할 땐 빛을 발했다. 햇볕 속에서도 스마트폰을 잘 볼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누군가에게 씌워줄 수도 있다. 밝기를 높이지 않아도 잘 보였다. 다만 양산 크기는 등까지 가릴 수 있게끔 충분히 큰 게 좋을 것 같았다. 또 바람이 불 때 쉽게 뒤집히는 점은 아쉬웠다.
점심식사를 할 때도 양산을 옆에 올려 놓았다. 자주 물건을 흘리고 다니는지라 걱정이 됐다./사진=남형도 기자
꽃무늬 양산을 쓰고 당당히 걸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쳐다보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 보진 않았다. 여성들은 남성들의 양산 사용에 대해 정작 신경을 안 쓴다는 응답이 많았다. 직장인 이다혜씨(27)는 "남성들도 더운 건 마찬가지일텐데, 양산을 써도 상관 없다고 생각한다. 크게 신경 안 쓴다"고 했고, 직장인 박수진씨(31)도 "남성들 스스로 양산을 쓰면 부끄럽다 여기는 것 같다"며 "요즘엔 양산과 우산 겸용 제품도 많은데, 그런 걸 쓰면 좋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오히려 여성보단 남성이 더 많이 쳐다보는 느낌이었다. 서울시청 인근서 남성 직장인 세 명 중 한 명이 쳐다봤다. 그러자 옆에 있던 남성 직장인 두 명도 고개를 뒤로 돌려 빤히봤다.
명동 인근 백화점 지하 한 양산 매장. 형형색색 양산들이 있지만 대다수 여성용 양산들이다. 남성 취향이 맞는 양산 종류는 많지 않았다./사진=남형도 기자
이 같은 편견은 양산 매장에서도 잘 드러났다. 명동 인근 백화점 지하에 위치한 양산 매장 4곳을 찾았다. 1곳엔 아예 남성용 양산이 없었고, 나머지 3곳도 남성용 양산 종류는 3~4개에 불과했다. 전체 99%는 여성용 양산이었다. 기자가 든 것처럼 꽃무늬거나, 화려하고 밝거나, 레이스가 달린 게 많았다. 대부분 여성 취향을 고려해 만들어진 제품이었다. 남성용 양산을 달라고 하니, 주로 무늬가 아예 없는 검은색·남색 양산을 권했다.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양산 매장 관계자는 "그래도 요즘 남자들도 양산을 많이 찾는다"며 "특히 머리 보호가 필요한 나이든 분들이 양산을 사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양산 매장서 잘 고르는 팁도 얻었다. 좋은 양산은 △자외선 차단율이 높은 것(보통 95%, 높게는 99.9%도 있었음) △코팅, 암막 처리가 된 것(햇볕을 더 잘 막아주고 눈부심이 덜 함) △천이 두꺼운 것 △가벼운 것 △어두운 것(밝은 것보다 자외선 차단율이 높음)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