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위의 편지]반에서 만난 따뜻한 사람들

머니투데이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2018.08.04 06:34
글자크기
빵을 굽기 위해 준비한 반죽. 그 옆에 불을 미리 피워둔 화덕이 있다./사진제공=이호준 여행작가빵을 굽기 위해 준비한 반죽. 그 옆에 불을 미리 피워둔 화덕이 있다./사진제공=이호준 여행작가


터키에 세 번째 찾아갔을 때는 EBS 여행 프로그램 '세계테마기행'에 출연하기 위해서였다. 그때만 해도 한국의 TV 카메라가 거의 들어가지 않았던 터키 동부지역을 취재했는데,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이란과의 접경지역인 반이라는 도시였다. 특히 쿠르드 족과의 만남을 통해 어떤 여행지보다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의 순수함과 '원시적' 전통을 고스란히 지키는 삶은 경이롭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로 특별했다.

한 농가를 찾아갔을 때였다. 마침 그날이 그 집에서 빵을 굽는 날이라고 해서 전날 미리 약속하고 들른 참이었다. 그 지역의 농가들은 빵을 사 먹지 않고 일주일 먹을 분량을 집에서 구워놓는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온 식구가 상기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방송카메라는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이었다. 주인은 단벌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있고 집안은 잔칫집처럼 들떠있었다. 헛간에는 빵 구울 준비가 다 돼 있었다. 안주인 외에도 또 한 사람의 여자가 있어서 누구냐고 물으니 동서라는 것이었다. 보통 빵을 구울 때는 친척 두세 사람이 모여서 공동 작업을 한다.



홍두깨로 반죽을 밀고 있다./사진제공=이호준 여행작가홍두깨로 반죽을 밀고 있다./사진제공=이호준 여행작가
빵을 만드는 절차는 비교적 단순했다. 밀가루에 소금과 이스트를 넣고 반죽해서 부풀리는 건 우리네 방식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머지는 칼국수 만드는 과정과 비슷했다. 밀가루 반죽을 홍두깨로 밀어 넓게 편 뒤, 피자 돌리듯 손으로 돌려서 얇게 만든다. 땅에 묻어놓은 큰 항아리가 빵을 굽는 화덕이었다. 화덕 안에 불을 피워 미리 달궈놓고, 넓게 편 반죽을 항아리 벽에 찰싹 붙이면 바로 익는다. 말로는 쉬운데 결코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화덕에 불을 피울 때는 양이나 소의 배설물 말린 것을 연료로 쓴다. 손으로 연료를 던져 넣고 그 손으로 빵을 구워도 더럽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두 여인은 빵을 만들면서 연신 깔깔거렸다. 외간 남자에게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 교조적 무슬림에 비해 엄청나게 개방적인 집안이었다. 여자들이 빵을 굽는 사이에 남자주인은 마당에서 차이를 마시며 희희낙락이었다. 여자들이나 하는 걸 왜 구경하느냐는 듯, 자꾸 나를 불러냈다. 옆에 앉으면 자신의 가계 내력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의 집안은 조상 대대로 그 지역에서 살았는데, 부모가 이란으로 강제 이주했다가 오스만 제국이 무너진 뒤 돌아왔다고 했다. 오스만은 제국의 땅이 넓어지면서 효율적 지배를 위해 점령지에 국민을 강제 이주시키기도 했다.



홍두깨로 민 반죽을 손으로 돌려 넓게 핀다./사진제공=이호준 여행작가홍두깨로 민 반죽을 손으로 돌려 넓게 핀다./사진제공=이호준 여행작가
그 동네는 씨족사회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을 전체가 '샤키르'라는 가문의 땅이었다. 그러다 보니 친인척도 무려 200명이나 된다는 것이었다. 그 집 주인의 아버지는 두 명의 어머니에게서 모두 17명의 형제를 낳았다. 그 형제들 대부분이 그 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밀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는 그곳에서는 사람을 노동력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며느리를 들이면 노동력이 증가한 것으로 본다. 딸을 시집보내는 집의 입장으로는 노동력을 상실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돈이나 재물을 받는다. 보통 열다섯 살에 중학교를 졸업한 뒤 2년 정도 살림을 배우고 열일곱 살쯤 시집을 간다. 신기한 건 아직도 친족 중심의 혼인제도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 즉, 결혼은 보통 4촌 끼리 한다. 그러다 보니 숙모가 느닷없이 시어머니가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결혼과 관련, 끔찍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첫날밤을 보낸 뒤 신부가 숫처녀가 아니었을 경우 가차 없이 살해하는 풍습이 남아있다고 한다. 신랑이 친정에 연락하면 아버지가 와서 딸을 죽인다. 그곳에서는 이를 명예살인이라고 한다. '군에 간 오빠가 아버지의 연락을 받고 나와서 집안 망신 시킨 동생을 죽였다'는 기사를 보는 건 드문 일이 아니라고 했다.


완성된 빵./사진제공=이호준 여행작가완성된 빵./사진제공=이호준 여행작가
복수살인이라는 것도 있다. 마르딘이란 곳에 한 형제가 있었는데 동생이 형에게 딸을, 즉 조카를 며느리로 달라고 했단다. 그러나 형의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다. 즉, 자신의 처가에 시집보내기로 한 것. 사건은 약혼식 날 터졌다. 총을 들고 나타난 동생이 형의 일가족을 향해 난사한 것이었다. 그 와중에 막내아들만 살아남았는데, 잡혀가는 작은아버지를 둘째손가락으로 똑바로 가리키더란다. 그건 단순한 손가락질이 아니라 '기다리라'는 뜻이란다. 사람들 앞에서 그 손가락질을 하는 순간 '널 끝까지 쫓아가 죽이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끔찍한 일이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런 것을 명예로 알며 살고 있다.

하지만 그들 개인 개인은 한없이 따뜻했고 손님에게 무엇이든 베풀려고 애썼다. 종일 촬영을 해도 귀찮아하는 기색 하나 없이 끊임없이 먹을 걸 내오고 진행을 도와줬다. 그날 그 일가족과의 작별은 쉽지 않았다. 수십 명의 일가친척 하나하나와 인사를 나눈 뒤에도, 동네 사람과 강아지들까지 모두 나와 손을 흔들었다. 내가 여행을 다니며 만났던 사람들 중 가장 따뜻하고 정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이호준의 길위의 편지]반에서 만난 따뜻한 사람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