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기스토리]매출 80억 中企가 장학재단에 100억 쓴다?

머니투데이 중기협력팀 배병욱 기자 2018.07.09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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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드밴(드림포스) 김중제 대표 "다들 제가 되게 부자인 줄 알죠. 돈은 가치 있게 써야"

꿈꾸는 장학재단 이사장인 김중제 이카드밴(드림포스) 대표/사진=중기협력팀 배병욱 기자꿈꾸는 장학재단 이사장인 김중제 이카드밴(드림포스) 대표/사진=중기협력팀 배병욱 기자


"기부할 때 제일 행복해요."

'기부천사' 가수 션의 말이다. 그의 기부가 늘 화제가 되는 까닭은 '가진 것 이상'을 내놓기 때문이다. 그동안 기부한 금액이 45억원이라고 한다.



가끔 이렇게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이들의 선행이 세간에 알려진다. 이들은 무엇 때문에 분수에 넘치도록 베풀까. 보통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신념'이란 게 있나. 단순히 착해서인가.

의외로 이들의 대답은 간단하다. 그냥 '행복하다'는 것이다.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그들만의 행복'이다. 이럴 때 우린 이렇게 외치곤 한다. "리스펙트(respect)"



'누군가를 돕는 게 그렇게 행복하다'는 또 다른 이를 만났다. 밴(VAN) 서비스 기업 이카드밴(드림포스)의 김중제 대표다. 이 회사의 최근 3년간 매출액은 72억원(2015년), 83억원(2016년), 76억원(2017년). 고만고만한 중소기업이다.

김 대표는 2016년 12월 '꿈꾸는 장학재단'을 설립했다. 1년 6개월 남짓한 현재까지 이곳에 15억원을 출연했다. 재단 설립 시 10년 안에 100억원을 내놓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그는 어떤 삶을 살아왔나.

1960년 경북 봉화군 물야면에서 태어났다. 집은 컸고 부유했다. 한학자(漢學者)였던 그의 아버지는 11남매(3남 8녀)를 키웠다. 그의 부친은 늘 누군가를 돕는 이였다. 동네에 산모가 생길 때면 집안 허드레꾼을 시켜 지게 편으로 쌀 2말씩을 꼭 보냈다. 당시만 해도 먹을 게 풍족하지 않아서다.


문전걸식하는 상이군경과 거지들은 제집 드나들듯 했다. 자신들의 아들딸을 모두 데리고 오는 날도 수두룩했다. 아버지는 싫은 내색 하나 없이 그들을 먹였고 앞채에서 잠도 재워 보내곤 했다.

소년 김중제는 이런 대인 아래 자랐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그날도 아들딸을 앞세운 걸인이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자식들은 무척 어려 보였다. 그 광경을 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엔 저들처럼 어려운 아이가 많겠지. 나중에 어른이 되면 세계에서 가장 큰 고아원을 만들어 힘든 아이들을 돌보겠다."

소년 김중제에겐 꿈이 생긴 날이었다. 아버지는 침이 마르도록 일렀다. '노력하는 자들을 도와야 한다.' 소년이 중학교 2학년 되던 해, 아버지는 위암으로 흙이불을 덮으셨다. 그 뒤 동네 어른들은 소년만 보면 얘기했다. "네 아버님, 참으로 훌륭한 분이셨다." "네 부친 덕분에 몸을 잘 풀 수 있었다." "그분이 안 계셨으면..."

소년은 깨달았다. '아버지가 가치 있는 삶을 사셨구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먹고 사는 데는 지장 없었다. 남은 재산 덕분이었다. 소년도 커서 대학엘 가고 군에 입대했다. 하지만 그 사이 가세는 기울기 시작했다. 형의 방탕한 생활 때문이었다. 제대하고 돌아오니 모든 재산은 탕진된 상태였다. 집도 넘어가고 없었다.

무역학을 전공한 그는 1985년 섬유 수출 업체에 취직한다. 바이어 상담부터 선적까지의 업무를 맡았다. 1988년 결혼도 했다. 1990년 말 어느 날 회사 사장과 마주 앉았다.

"사장님, 저 퇴직하려고 합니다. 회사에서 주는 월급으로 먹고사는 데는 문제 없습니다. 하지만 남을 도울 수 없습니다. 사업을 할 생각입니다. 많이 벌어서 많은 사람을 돕고 싶습니다."

30세였다. 어슬프게 사업을 벌이려 했지만 마음 같지 않았다. 1991년 다시 무역회사로 입사했다. 잡화, 기계 등을 수출하는 곳이었다. 1년도 채 안 돼 회사가 급격히 어려워졌다. 안 되겠다 싶어 또다시 창업을 결심한다. 그동안 쌓아온 노하우와 인맥을 바탕으로 무역업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해서 1992년 한양통상이 세워졌다. 일본 대만 등으로부터 락킹 너트를 수입, 쌍용자동차에 납품했다. 아울러 국내 잡화의 인도 수출을 병행했다. 선적 기일을 못 맞추는 등 수출길이 막힌 의류를 백화점 매대에서 판매하는 일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가 신용카드 조회기 사업을 추천한다. 1993년 당시 국내엔 VAN 사가 3곳이었는데, 이 중 1곳을 선택했다. 가맹점에 신용카드 조회기를 설치해 주고 VAN 사로부터 마진을 취하는 구조였다. 지금은 결제 금액에 대한 수수료가 있지만, 당시는 기계 판매 마진만 있을 때다.

1994년엔 나이스정보통신 대리점이 된다. 한양통상을 '한양통신'으로 변경하고 신용카드 조회기 사업을 본격 추진했다. 직원 수는 4명. 사무실엔 늘 여직원 1명만 있었다. 김 대표를 포함한 모든 직원은 1인당 하루 평균 100여곳의 가맹점을 방문했다. 100곳을 영업해야 1~2군데가 걸렸다. 꼬박 3년 동안 가맹점을 누볐다.

거래처(가맹점)가 쌓이면서 일은 한결 수월해졌다. 기존 가맹점이 신규 가맹점을 소개하는, 새끼가 새끼를 치는 형국이었다. 결과는 마뜩했다. 40여개의 나이스정보통신 대리점 가운데 랭킹 3위 안에 드는 대리점이 된 것이다. 앞서가는 이에게 더 많은 기회가 생기는 법이다. 2002년 '스마트로' 측에서 지사 격인 수도권 총판을 제안해 왔다. 이때부터 개인사업자 수준이던 것이 중소기업으로서의 외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김 대표는 2003년 한양통신을 법인으로 전환했다. 동시에 사명을 지금의 '이카드밴'으로 바꾼다. 당시 매출액은 20억원가량. 그는 이 무렵부터 '도움의 손길'을 뻗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형편이 어려워 학비를 못 낼 정도라고 하면 선뜻 준비해 건넸다. 10년 정도 그렇게 개인적으로 선행을 베풀었다. 2013년부터는 아예 회사 차원에서 10여명의 학생들을 정기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다 2016년 12월 그의 꿈을 실천에 옮긴다. '세상 가장 큰 고아원'은 아니지만 '꿈꾸는 장학재단'을 설립했다. 설립 시 10억원(기본출연금 5억원, 보통출연금 5억원)을 출연했다. 지난해 5억원을 추가로 냈다. 올 연말에도 5억원을 내놓는다. 몇 달 후면 2년 사이 20억원을 내놓는 셈이 된다. 그리고 해마다 5~10억원씩 내놓을 것이라고 했다. 10년 안에 100억원을 장학재단에 붓겠단다.

이쯤되니 궁금해진다. 아내는, 직원들은 어떤 마음일까. 그는 "아내는 함께 살면서 내성이 생긴 거 같다"며 "특히 아내 역시 어려운 환경 속에 자랐기 때문에 힘든 이들의 마음을 잘 아는 편"이라고 했다.

내성이 생길 만도 했다. 신혼 시절 김 대표가 직장 다닐 때의 일이다. 한 친구가 운전 중 인명 사고를 냈다. 변호사 구할 돈 50만원이 없어 곤경에 처했다. 이를 알게 된 김 대표는 카드 대출을 받아 그 친구 어머니에게 건넨다. 당시 그의 월급은 30만원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재형저축을 들었던 김 대표. 급여의 30%가량을 떼서 저축했고 3년 만기였다. 만기 때 탄 500만원을 가정 형편이 안 좋은 누나에게 싹 갖다줬다. 김 대표 역시 부엌 하나 딸린 단칸방에서 2000만원짜리 전세살이를 할 때였다. 속은 문드러졌을지언정 이런 것까지 "잘했어요"라고 말해 주는 이가 그의 아내였다.

김 대표는 직원들의 몫도 챙기고 있다고 했다. 자잘한 것도 있지만, 특히 해마다 영업이익의 40%를 임직원들에게 돌려준다. 그는 "매출액은 크지 않지만 VAN 수수료가 매출이어서 일반 제조업보다는 형편이 나은 편"이라며 "올해엔 감사하게도 100억 매출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현재 꿈꾸는 장학재단을 통해 장학생 120명을 지원하고 있다. 그를 굉장한 재력가로 보는 사람이 많단다. 이에 대해 그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면서 "33평 아파트도, 소비 습관도 전혀 변함없다"고 했다.

"내가 가진 것을 진짜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주는 것이 보람이죠. 특히 다음 세대인 우리 청소년들을 위해 쓰는 게 행복합니다. 내가 10만원, 20만원을 쓴다고 생각해 봐요. 그 돈은 어려운 청소년들에게 소중한 학비일 수 있습니다. 과연 어떤 돈이 정말 가치 있을까요."

동귀수도(同歸殊塗)

귀착점은 같지만 경로가 다르다는 뜻이다. 우리는 모두 좀 더 행복한 미래를 위해 살아간다. 하지만 사는 모습은 저마다 다르다. 어떤 이(A)는 한없이 주면서, 어떤 이(B)는 끝없이 욕심을 채우면서 기뻐한다. 사실 어중간하게 사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적당히 주고 적당히 욕심내면서 말이다. A나 B나 스스로 만족하는 건 똑같다. 다른 건 그들의 주변이다. A 곁엔 얻는 이들이, B 곁엔 잃는 이들이 많다. 비단 재물만이 아니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내 곁에 있는 이들은 어떨까.

꿈꾸는 장학재단의 장학증서 수여식에서 장학생 가족 및 관계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사진제공=꿈꾸는 장학재단 꿈꾸는 장학재단의 장학증서 수여식에서 장학생 가족 및 관계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사진제공=꿈꾸는 장학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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