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현대시'로 등단한 권애숙(1954~ ) 시인이 한 문학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시인은 또 "세 권의 시집에서 연속적으로 나타난 것이라면 세상과 자아에 대한 절망이며 그 고통에 대처하는 삶의 방식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9년 만에 낸 네 번째 시집 '흔적 극장'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오래 흔들린 통점들"('시인의 말')에 대한 자각과 고통의 경계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을 표출하고 있다.
거기,
왔어?
- '왔어?' 전문
표제시 '문득,'에서 보듯, "세월 밖으로 꽃들이 지던 날" 당신은 "내 치마폭에 서늘한 달가시를 찔러 넣"는다. 나와 함께한 삶이 당신에게는 "찌그러진 시절"이었다며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한다. "내게 바깥을 만들어 준 당신"으로 인해 나는 삶의 방향을 잃고 속수무책으로 이별을 견딘다. 울음과 그리움은 남겨진 사람의 몫이다. "거기,// 왔어?"는 일말의 기대감이다. 잔인한 희망이다. 항우울제인 렉사프로를 먹으면서도 당신을 떠나보낼 수 없는 절절한 사랑이다. "보 고 싶 다 보고 싶 다"('그리고, 렉사프로')의 자간에서 사랑과 그리움은 극에 달한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듯하다.
하지만 이별을 한, 그리움의 대상인 '당신'은 좁은 의미로는 남편이겠지만 넓게는 먼저 세상을 떠나보낸 이들이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흔히 만날 수 있는 꽃, 달, 섬, 돌탑과 같은 사물들이다. 그리고 구멍, 담벼락, 벼랑, 발바닥 등은 이별 전후 급격한 심경의 변화를 대변하는 시어들다. 특히 시집에 자주 등장하는 골목은 이 모든 감정이 잘 버무려진 공간이다. 삶의 애환이 극명하게 드러난 골목은 소소한 사건과 안과 밖을 구분하는 담벼락이 존재한다. 시인이 담이나 벽, 담장이라 하지 않고 담벼락이라 한 것은 담벼락의 '벼락'에서 느껴지는 말의 역동성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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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잠하게 물색없이, 사실 엎드려 기어가는 당신은 엄마가 아닌지도 몰라. 펄럭 펼치는 물무늬 치맛자락도 어미 품 아닌지 몰라. 갈라진 얼굴 뒤편, 당신은 너무 많이 지웠어. 접고 접혀 너무 밋밋해. 돌멩이 던져 넣어도 마냥 환하게 열었다 닫는 주름 좀 봐. 처음부터 속은 거지. 엄마란 말 저쪽으로 한 번도 건너보지 못한 당신, 숨긴 길목에서 떠도는 그 많은 부레들 어쩔 거야. 저 물목 근처 낭창거리는 바람 한 사발 걸치고 울음통의 수위, 둑을 넘어 보셔야지. 찰싹 달라붙어 옆구리 푹푹 파대는 내 발목 잡아채 쫘악, 안주로 뜯어 자셔야지. 여직 들창 하나 못 낸 무덤 같은 강물엄마!
- '강물엄마' 전문
시 '강물엄마'는 흘러가는 강물을 엄마에 비유해 썼다. 혼자 강가에 앉아 흘러가는 강물(엄마)에게 투정을 부리는 듯하다. 하지만 가만 들어보면 돌아가신 엄마가 아닌 자신에게 하는 것 같다. 화자는 "돌멩이 던져 넣어도 마냥 환하게 열었다 닫는" 엄마의 넉넉한 품을 말하는 동시에 그 이면의 주름에 주목한다. 따뜻하고 넉넉한 품으로 세상을 끌어안았던 엄마지만 "엄마란 말 저쪽으로 한 번도 건너보지 못한" 삶이기에 "숨긴 길목에서 떠도는 그 많은 부레들"과 "저 물목 근처 낭창거리는 바람 한 사발 걸치고 울음통의 수위"를 알 수 없다는 것. "둑을 넘어"보지 못해 강 밖의 일이나 삶을 모른다는 것. 엄마라는 역할에는 충실했지만 그건 진정한 내 삶이 아니라는 것.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내가 아닌 '내 이름 석 자'를 내걸고 경계를 벗어난 삶을 살라는 '자기암시'인 것이다. "엉뚱하게 쌓이던 바깥이 무너지고"('돌탑'), "화면 밖으로 침을 흘리는 여자의 검은 매니큐어"('낙지탕탕이라 쓰고'), "금방 화면 밖으로 내달린다"('달려라 누!') 등에서도 이러한 욕망을 엿볼 수 있다.
이번 시집에서는 사람에 대한 희망, 경계를 넘고 싶은 욕망,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따뜻하게 품어주는 엄마 같은 사랑을 다룬 시들을 곳곳에서 마주칠 수 있다. 심해 생물들이 짝을 찾기 위해 보내는 차가운 불빛신호를 형상화한 '콜드라이트', 히말라야 마지막 유목민 창피족의 풍습과 자유의지를 표현한 '아무리족', 응달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음지식물들의 사랑을 다룬 '응, 응,', 암사슴을 두고 수사슴 두 마리가 치열하게 싸우는 '초원의 꿈' 등이 그것이다. 이 시집 전체 분위기를 대변하는 시 '저녁산책'을 조용히 읊조리면 "오래 흔들린 통점"이 서서히 아파온다.
갈림길 내리막에 시큼한 살내 걸쳐놓고
세상을 등진 저녁이 쓸쓸을 끓이는 시각,
산수국 헛꽃처럼 피어
희망은 너무 오래 나를 유린했다
◇흔적 극장=권애숙 지음. 포엠포엠 펴냄. 116쪽/1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