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내게 바깥을 내어준 당신

머니투데이 김정수 시인 2018.06.16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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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권애숙 시인 '흔적 극장'

[시인의 집]내게 바깥을 내어준 당신


"첫 시집 '차가운 등뼈 하나로'가 세상을 향한 날것의 정면충돌이었다면 '카툰세상'에서는 좀 역설적으로 세상을 몰아붙였다고나 할까요. 그러다 '맞장 뜨는 오후'에선 생성과 소멸, 삶과 죽음에 대해 집중했던 것 같아요."

1995년 '현대시'로 등단한 권애숙(1954~ ) 시인이 한 문학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시인은 또 "세 권의 시집에서 연속적으로 나타난 것이라면 세상과 자아에 대한 절망이며 그 고통에 대처하는 삶의 방식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9년 만에 낸 네 번째 시집 '흔적 극장'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오래 흔들린 통점들"('시인의 말')에 대한 자각과 고통의 경계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을 표출하고 있다.



밥솥을 열고 당신 다녀간 줄 안다. 저녁은 이미 저 혼자 멀어져 발소리조차 아득한데 내 몸을 뒤적거리던 바람은 기어이 얇아진 밥주걱 같은 나를 뒤집는다. 허름한 것들이 구석으로 몰려들면 내게 바깥을 만들어 준 당신, 구멍은 울보인 너라고 엉뚱한 담벼락을 세우며 나를 파내던 당신, 가나오나 걸음이 느린 당신은 뜨거운 새가 되었나 자주 내 식은 밥그릇에 찍어 놓는 굽은 발가락이 수북하다 움푹, 움푹, 허기가 지는 봄 밤 살구꽃처럼 이별이란 참 오래 뜸이 들지 않아서

거기,
왔어?
- '왔어?' 전문




이 시는 이혼의 위기에 처한 중년부부의 쓸쓸한 삶을 연상시킨다. 오래 흔들린 삶인지라 무덤덤해질 만도 한데, 정(情)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 없는 감정이 만져진다. 별거 중이거나 밤낮이 서로 달라 마주치지 않는 부부, "밥솥을 열"어보고서야 "당신이 다녀간" 것을 안다. 밤이 오기 전에, 나를 만나기 전에 서둘러 집을 떠났다는 것을 알기에 "얇아진 밥주걱 같은" 마음은 뒤집어진다. 나는 아직 당신을 보내지 못했는데, 당신은 이미 나를 떠났다. 이별의 책임마저 "구멍"인 나에게 있다고 한다.

표제시 '문득,'에서 보듯, "세월 밖으로 꽃들이 지던 날" 당신은 "내 치마폭에 서늘한 달가시를 찔러 넣"는다. 나와 함께한 삶이 당신에게는 "찌그러진 시절"이었다며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한다. "내게 바깥을 만들어 준 당신"으로 인해 나는 삶의 방향을 잃고 속수무책으로 이별을 견딘다. 울음과 그리움은 남겨진 사람의 몫이다. "거기,// 왔어?"는 일말의 기대감이다. 잔인한 희망이다. 항우울제인 렉사프로를 먹으면서도 당신을 떠나보낼 수 없는 절절한 사랑이다. "보 고 싶 다 보고 싶 다"('그리고, 렉사프로')의 자간에서 사랑과 그리움은 극에 달한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듯하다.

하지만 이별을 한, 그리움의 대상인 '당신'은 좁은 의미로는 남편이겠지만 넓게는 먼저 세상을 떠나보낸 이들이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흔히 만날 수 있는 꽃, 달, 섬, 돌탑과 같은 사물들이다. 그리고 구멍, 담벼락, 벼랑, 발바닥 등은 이별 전후 급격한 심경의 변화를 대변하는 시어들다. 특히 시집에 자주 등장하는 골목은 이 모든 감정이 잘 버무려진 공간이다. 삶의 애환이 극명하게 드러난 골목은 소소한 사건과 안과 밖을 구분하는 담벼락이 존재한다. 시인이 담이나 벽, 담장이라 하지 않고 담벼락이라 한 것은 담벼락의 '벼락'에서 느껴지는 말의 역동성 때문이다.


잠잠하게 물색없이, 사실 엎드려 기어가는 당신은 엄마가 아닌지도 몰라. 펄럭 펼치는 물무늬 치맛자락도 어미 품 아닌지 몰라. 갈라진 얼굴 뒤편, 당신은 너무 많이 지웠어. 접고 접혀 너무 밋밋해. 돌멩이 던져 넣어도 마냥 환하게 열었다 닫는 주름 좀 봐. 처음부터 속은 거지. 엄마란 말 저쪽으로 한 번도 건너보지 못한 당신, 숨긴 길목에서 떠도는 그 많은 부레들 어쩔 거야. 저 물목 근처 낭창거리는 바람 한 사발 걸치고 울음통의 수위, 둑을 넘어 보셔야지. 찰싹 달라붙어 옆구리 푹푹 파대는 내 발목 잡아채 쫘악, 안주로 뜯어 자셔야지. 여직 들창 하나 못 낸 무덤 같은 강물엄마!
- '강물엄마' 전문


시 '강물엄마'는 흘러가는 강물을 엄마에 비유해 썼다. 혼자 강가에 앉아 흘러가는 강물(엄마)에게 투정을 부리는 듯하다. 하지만 가만 들어보면 돌아가신 엄마가 아닌 자신에게 하는 것 같다. 화자는 "돌멩이 던져 넣어도 마냥 환하게 열었다 닫는" 엄마의 넉넉한 품을 말하는 동시에 그 이면의 주름에 주목한다. 따뜻하고 넉넉한 품으로 세상을 끌어안았던 엄마지만 "엄마란 말 저쪽으로 한 번도 건너보지 못한" 삶이기에 "숨긴 길목에서 떠도는 그 많은 부레들"과 "저 물목 근처 낭창거리는 바람 한 사발 걸치고 울음통의 수위"를 알 수 없다는 것. "둑을 넘어"보지 못해 강 밖의 일이나 삶을 모른다는 것. 엄마라는 역할에는 충실했지만 그건 진정한 내 삶이 아니라는 것.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내가 아닌 '내 이름 석 자'를 내걸고 경계를 벗어난 삶을 살라는 '자기암시'인 것이다. "엉뚱하게 쌓이던 바깥이 무너지고"('돌탑'), "화면 밖으로 침을 흘리는 여자의 검은 매니큐어"('낙지탕탕이라 쓰고'), "금방 화면 밖으로 내달린다"('달려라 누!') 등에서도 이러한 욕망을 엿볼 수 있다.

이번 시집에서는 사람에 대한 희망, 경계를 넘고 싶은 욕망,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따뜻하게 품어주는 엄마 같은 사랑을 다룬 시들을 곳곳에서 마주칠 수 있다. 심해 생물들이 짝을 찾기 위해 보내는 차가운 불빛신호를 형상화한 '콜드라이트', 히말라야 마지막 유목민 창피족의 풍습과 자유의지를 표현한 '아무리족', 응달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음지식물들의 사랑을 다룬 '응, 응,', 암사슴을 두고 수사슴 두 마리가 치열하게 싸우는 '초원의 꿈' 등이 그것이다. 이 시집 전체 분위기를 대변하는 시 '저녁산책'을 조용히 읊조리면 "오래 흔들린 통점"이 서서히 아파온다.

갈림길 내리막에 시큼한 살내 걸쳐놓고

세상을 등진 저녁이 쓸쓸을 끓이는 시각,

산수국 헛꽃처럼 피어
희망은 너무 오래 나를 유린했다

◇흔적 극장=권애숙 지음. 포엠포엠 펴냄. 116쪽/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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