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우경화·여성혐오…세계는 왜 지금 ‘분노’하고 있나

머니투데이 김고금평 기자 2018.06.16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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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끈따끈 새책] ‘분노의 시대’…계몽주의 시대부터 이어져 온 ‘분노의 역사’

테러·우경화·여성혐오…세계는 왜 지금 ‘분노’하고 있나


현재 세계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하나로 요약하는 키워드는 ‘분노’다. 잔혹한 테러, 우경화에 따른 민족주의, 소셜 미디어의 여성 혐오까지 편집증적 분노와 폭력이 세계 곳곳을 덮치고 있다.

ISIS(이라크 시리아 이슬람 국가) 대원의 인질 참수 장면이 인터넷으로 생중계되고 한적한 프랑스 해변에선 트럭이 무고한 시민을 향해 돌진한다. 세계 정치판도 다르지 않다. 극우주의자들의 등장으로 국익 우선을 핵심으로 하는 보이지 않는 폭력의 그림자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인도에선 힌두 민족주의를 앞세운 나렌드라 모디가, 필리핀에선 국가 차원의 폭력을 서슴지 않는 로드리고 두테르테가 집권하며 화합이나 협력과 거리가 먼, 또 다른 증오의 축이 형성돼 있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터키의 에르도안, 중국의 시진핑 등 장기 독재 체제 구축에 나선 통치자의 면면에서도 불안감이 읽힌다.

개인사의 관점에서도 현실과의 괴리에 따른 분노 게이지는 높아지고 있다. 개인의 욕망은 정치·경제 시스템이 수용하는 수준을 훨씬 넘어서고 있지만 현실은 기대와 달리 지지부진하고 무력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처지를 확인할 뿐이다.



특히 사라져가는 전통 사회와 새로운 사회 질서 어디에도 발붙이지 못하는 비서구 사회의 젊은이들은 낙담과 좌절을 넘어 분노를 키우는 게 현실이다.

저자는 전 세계적으로 분출하는 분노를 ‘서구 대 비서구’ ‘우리 대 그들’ 기독교와 이슬람의 ‘문명의 충돌’ 같은 식으로 이원론적 잣대를 들이대는 모든 해석에 반기를 든다.

테러, 폭력, 분노가 이슬람 근본주의 탓으로 돌리려는 서구 기득권층의 입장(가까이는 비주류를 억압하는 주류의 시각)은 강압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이분법적 사고는 서구(주류)의 입맛에 맞게 재단한 근시안적 관점으로, 현재의 분노는 서구에서 근대 세계가 태어날 때부터 숙명적으로 잉태한 오래된 감정의 재현이라고 저자는 해석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탈종교적 개념으로 관점의 혁명을 선도한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합리성을 능력주의 사회에서 찾았다. 그러다 보니, 이 새로운 사회에서 대다수 민중은 최상부에 위치한 계몽된 사람들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당대 유럽 사상가들의 머릿속에는 피지배자인 민중으로부터 진보가 이뤄질 수 있다는 생각이 존재하지 않았던 셈이다.

계몽 철학의 합리주의는 새로 부상한 야심적인 계급에 유리한 철학이었고 계몽 철학자들은 궁극적으로 상류 사회에 완전히 통합된 사람들이었다.

인간이 평등하다는 계몽철학의 기저를 인식한 민중이 불평등한 계급에 순응했을까. 산업화에 따라 끔찍한 노동 조건을 경험한 이들의 기대가 좌절될수록 부르주아에 대한 반감은 커졌고 (노동자의) 분노는 결국 혁명을 이끌었다.

조건의 평등과 계급의 종식으로 정의되는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자유 민주주의자보다 평등의 원칙을 더 깊이 이해하는 전체주의로부터 싹튼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는 얘기다.

저자는 “오늘날 서구사회는 나치즘, 파시즘 같은 전체주의를 재앙을 불러일으킨 역사의 일탈로 취급하려 한다”며 “하지만 전체주의는 유토피아주의, 사회공학, 실존을 위한 폭력 투쟁 등 19세기 유럽을 지배한 여러 이데올로기적 조류들의 결정체라는 논리적 결과물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분노의 사회경제적 원인은 근대 세계에 이미 내재한 것으로 19세기 근대화 과정에서 한 차례 경험한 역사를 비서구 세계가 뒤늦게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라고 저자는 통찰한다.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똑같은 것을 열망하라고 부추기는 동질적 세계시장에서 밀려나고 버림받은 인간이 느끼는 분노는 갑자기 태어난 것이 아니다. 또 다른 전체주의의 비슷한 비극과 오류에 직면하기 전에 수백 년 전 암시한 교훈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분노의 시대=판카지 미슈라 지음. 강주헌 옮김. 열린책들 펴냄. 464쪽/2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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