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튀어나온 '보행자'…못 피하면 '범죄자'

머니투데이 김종훈 기자 2018.05.19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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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 [Law&Life-'예측불가' 무단횡단 ①] '예측·회피 불가능' 입증 땐 운전자 무죄…그러나 입증 어려워

/그래픽=이지혜 디자인기자/그래픽=이지혜 디자인기자


#2018년 4월20일 새벽, 광주 쌍촌동의 한 도로에 택시가 멈춰섰다. 두 여성이 택시에서 내렸다. 이들은 횡단보도가 없는 도로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걷다가 나중에는 뛰기 시작했다. 그 찰나 차량 한대가 쏜살같이 지나가며 두 여성을 치었다. 이들은 병원으로 옮겨졌고 한 사람은 다음날 숨졌다.

운전자 A씨는 교통사고처리특례법 위반으로 경찰에 입건됐다. 그는 "보행자들을 미처 보지 못했다"라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고 당시 상황을 담은 영상이 공개된 뒤 온라인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갑자기 뛰어나온 무단횡단자를 친 운전자에게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를 놓고서다.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해당 운전자를 처벌하지 말아달라, 무단횡단에 엄한 책임을 물어달라는 취지의 국민청원이 진행 중이다.

도로 위든 어디든 차보다는 보행자가 먼저다. 그렇다고 아무 때나 무단횡단을 해도 되는 건 아니다. 법적 책임을 떠나 사고가 났을 때 더 위험한 쪽은 보행자다. 자칫 치명적인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갑작스러운 무단횡단 때문에 사고를 낸 운전자들은 억울할 수 밖에 없다. 이 경우 운전자는 예상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사고였음이 입증되면 처벌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입증이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결국 보행자와 운전자 모두 조심할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무단횡단 사고 치사율, 일반의 2배



무단횡단에 따른 교통사고의 치사율은 8.2%로 정상적인 도로횡단 중 사고가 발생했을 때보다 2배 이상 높다. 지난 2016년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가 2010년부터 2014년까지 집계된 경찰청 자료를 분석한 결과다. 이 기간 동안 한 해 평균 4768건의 무단횡단 교통사고가 발생해 391명이 숨졌다. 정상횡단시 교통사고는 매해 평균 1만4679건 발생하고, 사망자는 평균 589명으로 치사율로 환산하면 4%였다.


무단횡단 사고의 치사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은 운전자 입장에서 예측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만큼 대응시간이 짧아 피하거나 속도를 줄이기 어렵다. 대개 일반 사고보다 높은 속도에서 사고가 발생하다 보니 보행자가 입는 충격도 더 크다.

무단횡단하는 보행자를 피하려다 2차 사고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지난 2월 경기도 부천 소사구에서 1차로를 달리던 차량이 중앙분리대에 가려 보이지 않던 무단횡단 보행자를 피하려고 급하게 운전대를 돌리다 옆 차로 차량과 충돌한 사건이 있었다. 이후 사고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경찰과 보험사가 "상대 사고차량을 앞지르려다 사고난 것 아니냐"며 이 운전자의 100% 과실을 의심하는 상황이 나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무단횡단에 대한 안전불감증은 보행자와 운전자 모두 심각한 수준이다. 경찰 자료에 따르면 무단횡단 보행자 단속 건수는 2014년 13만7051건에서 2015년 37만8201건, 2016년 55만387건으로 급증했다. 운전자는 횡단보도에서 보행자의 안전을 위해 어느 때라도 정지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는 보행자 보호의무를 지켜야 한다. 이 보호의무를 위반한 차량 단속 건수도 2014년 5372건에서 2015년 9358건, 2016년 2만5887건으로 크게 늘었다. 단속 강화에 따른 결과임을 고려해도 적지 않은 숫자다.

◇'예측·회피 불가능' 입증 땐 운전자 무죄…그러나 입증 어려워

무단횡단하던 보행자가 사고로 숨지거나 불구, 불치 또는 난치병을 얻었다면 보험 가입 여부와 상관없이 운전자는 중과실치사상죄 등으로 형사처벌을 받는다.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횡단보도 인근에서 발생한 사고인지 여부에 따라 다르게 처리된다.

횡단보도 인근 사고라면 운전자가 보행자 보호의무를 지켰는지가 우선 문제가 된다. 횡단보도 앞이라고 무조건 감속 또는 정지한 뒤 좌우를 살피라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든 브레이크를 밟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만약 보행자 신호가 막 빨간불로 바뀌었을 때 횡단보도에 진입한 차량이라면 아직 횡단보도에 보행자가 있을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감속하거나 경적으로 주의를 줘야 할 의무가 있다.

횡단보도 보행자 보호의무 위반은 △중앙선 침범 △음주운전 △보도침범 등과 함께 '12대 중과실'로 분류된다. 12대 중과실로 인명피해 사고를 내면 피해자와의 합의나 보험 가입 여부와 상관없이 형사처벌 대상이다. 횡단보도 인근 사고가 아니라면 대개 신호위반이나 과속 여부가 문제가 된다. 신호위반이나 제한속도를 시속 20km 이상 초과해 인명피해 사고를 낸 경우도 12대 중과실로 분류돼 형사처벌 대상이 된다.

무단횡단 사고로 재판에 넘겨졌더라도 사고를 예상할 수도, 회피할 수도 없었음을 입증한다면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다. 신호를 받고 좌회전하던 도중 무단횡단 보행자와 부딪혀 사망사고를 낸 트럭운전자 A씨가 이를 근거로 지난 3일 1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2차로에 있던 A로서는 보행자가 3,4차로를 가로질러 다른 차량 사이로 무단횡단할 것을 예측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라고 판단했다. 또 "보행자가 3차로를 통과하고 약 0.44초 후 A씨 차량과 충돌한 것으로 감정됐는데 통상적으로 인지반응 시간은 1초"라며 사실상 회피가 불가능했다는 점도 인정했다. 헌법재판소도 무단횡단 보행자와 충돌해 사망사고를 낸 혐의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버스기사 B씨의 사건(2014헌마686)에서 사고 예측·회피 가능성이 있었는지를 충분히 검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렇다고 법원이 운전자의 면책 범위를 넓게 인정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게 판사들의 설명이다.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무단횡단 사고에 대해 무죄를 받은 판례는 예측 가능성을 전혀 기대할 수 없을 경우에만 면책돼야 한다는 취지로, 일률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며 "무단횡단을 예측할 수 있었다고 인정된다면 교통사고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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