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빙에세이]논리는 창녀나 변호사 같다

머니투데이 김영권 작은경제연구소 소장 2018.03.26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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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에세이] 내 영혼의 문장들 -14 / 인간은 너무 논리적이기 때문에 어리석다

[웰빙에세이]논리는 창녀나 변호사 같다


“논리는 창녀나 변호사 같다. 돈만 낸다면 누구와도 함께 갈 수 있다."

요즘 변호사들이 정말 그렇다. 돈만 내면 뭐든 다 변호해준다. 그들의 논리에 없던 죄도 생겨나고 있던 죄도 사라진다. 그들이야말로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마술사들이다. 그들은 오로지 의뢰인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다. 그들은 장사꾼이다. 법의 논리를 파는 장사꾼이다. 그들은 돈의 무게로 법의 정의를 잰다. 그들이 들고 있는 저울의 한쪽 편엔 돈뭉치가 올라간다. 돈다발만 두툼하면 정의의 논리는 그쪽에 착 달라붙는다.

그래서 오쇼 라즈니쉬는 "논리는 창녀나 변호사 같다"고 한다. "그것은 자기편에도 붙지만 적에게도 돌아간다"고 한다. 하여 논리는 얼마나 천박한가? 믿을 수 없는 자여, 그대 이름은 논리!



"논리적인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인간이다. 삶이 논리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랑은 비논리적이다. 삶과 인생의 아주 적은 부분만이, 표면의 피상적인 부분만이 논리적이다. 삶을 깊이 들어갈수록 점점 더 비논리적인 영역이 된다.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초논리적이 된다."

오쇼는 "인간은 너무 논리적이기 때문에 어리석다"고 한다. "학교를 다니고 대학을 다닌 사람들, 언어나 논리만을 배운 사람들, 오직 지성만을 개발하고 가슴은 닫혀 있는 사람들은 살아 있는 사원을 경험한 적이 없다"고 한다.



논리는 분석한다. 따지고 가르고 나눈다. 피어나는 장미도 논리를 만나면 쪼개진다. 그것은 이제 장미과 장미속의 관목이다. 담홍색, 담자색, 흰색 따위의 꽃이 피는 관상 꽃나무다. 과학의 논리로는 향기로운 장미의 사원을 만날 수 없다. 철학의 논리는 어떤가? 오쇼는 "철학은 캄캄한 밤에 어두운 방에서, 있지도 않은 검은 고양이를 찾는 장님과도 같다"고 한다. "그러나 독일인은 그것을 찾아낸다"고 한다. 논리적인, 너무도 논리적인 독일 철학자들이 그런 일을 한다.

나는 어떤가? 논리적인, 너무도 논리적인 나는 어떤 일을 하나? 나의 논리 또한 창녀나 변호사 같다. 그것은 언제나 나를 위해 봉사한다. 내 이익에 맞게 변론한다. 내 필요에 따라 논조를 바꾼다. 때로는 세련된 논리로 어른다. 때로는 예리한 논리로 무찌른다. 때로는 냉철한 논리로 파고든다. 때로는 현란한 논리로 사로잡는다. 때로는 감성적 논리로 호소한다. 그것은 언제나 내가 원하는 대로 합리화하고 정당화한다. 내가 원하는 대로 침소봉대하고 거두절미한다.

논리는 도구로서 유용하다. 강력하다. 하지만 삶은 논리를 따르지 않는다. 논리로는 삶의 역설을 풀 수 없다. 삶의 신비를 느낄 수 없다. 삶의 풍요를 누릴 수 없다. 논리적인 사람은 초라하다. 그는 온전한 진실을 품지 못한다. 따뜻한 사랑을 담지 못한다. 그는 머리만 크다. 머리만 바쁘다. 그의 머리는 뜨겁다. 그러나 가슴은 차갑다. 그의 머리는 불같다. 그러나 가슴은 돌같다. 그런 머리조차 따지고 보면 반쪽짜리다. 그는 논리와 언어의 좌뇌만 쓴다. 왼쪽 뇌에만 과부하를 걸고 산다. 감성과 직관의 우뇌는 졸고 있다.


이제 나의 삶은 논리에 갇힌다. 내가 논리를 부리는 게 아니다. 논리가 나를 부린다. 그런 논리 중의 논리가 돈의 논리다. 내가 원하는 게 돈이니 돈의 논리가 나를 부린다. 그런 논리 중의 논리가 정치논리다. 내가 원하는 게 힘 있는 자리이니 정치논리가 나를 부린다. 내 삶은 저급한 시장논리와 저열한 진영논리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창녀처럼 돈만 되면 달라붙고, 변호사처럼 돈만 되면 어떤 논리든 끌어당긴다. 그와 함께 내 삶의 사원에서 장미가 시든다. 향기가 사라진다. 내 삶은 논리의 감옥에서 메마른다. 어떻게 이 감옥에서 나가나? 어떻게 내 삶의 사원에 장미꽃을 피우나? 오쇼가 답한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생각하는 일에서 느끼는 일로, 논리에서 사랑으로 성향을 바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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