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동훈 SADI 원장은 1980년대부터 디자인을 공부한 국내 1세대 산업디자이너로 손꼽힌다. /사진=김휘선 기자
지난달 12일 서울 강남구 SADI(Samsung Art & Design Institute·삼성디자인교육원)에서 국내 '디자인 1세대'이자 '삼성 갤럭시' 디자인 주역으로 알려진 장동훈 원장을 만났다. 원장실 내부는 최신형 TV, 고미술 및 현대미술품, 아트페어 포스터가 한데 모여 어색한 듯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모두 (나에게) 영감을 주는 것들"이라고 했다.
-58년생에게 '디자인'은 생소한 개념 아니었나요.
디자인을 제대로 취급하는 회사도 적었다. 대부분이 디자인 부서 없이 기술, 연구, 마케팅 등의 부서에 관련 업무를 맡겼다. 장 원장은 "상사나 클라이언트가 외국 다녀와선 (실무자에게) 브로슈어(광고 책자) 하나 던져주며 '이렇게 해달라'는 게 당시의 수준이었다"며 "디자인은 '예쁘고 쓰기 편리한 것'이라는 인식이 강했다"고 회상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디자인 도둑질'이었던 셈이다.
장 원장은 서울대 미대 졸업 후 한국 IBM에 입사했다. 당시 회사에서는 유일한 미대 출신으로, 웹이나 멀티미디어 등 다양한 매체를 접할 기회였다. /사진=김휘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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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이 두 분 다 평안북도 출신이세요. 이북 분들이라 연세에 비해 사고가 진보적이고 진취적이시죠. 특히 어머니가 한국화가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어릴 때 어머님이 시외버스 타고 도봉산을 비롯해 인근 산과 들로 스케치 나가실 때마다 졸졸 따라다니고, 미술실에서 그림 그리실 때는 옆에 앉아서 같이 그렸어요."
장 원장은 1976년 서울대 미술대학 응용미술과에 입학해 시각디자인을 배웠다.(20여 년 뒤에야 디자인학부가 신설됐다). 그는 "기본적으로는 그림을 좋아했지만 음악, 영상, 스토리텔링 등 다양한 매체에 관심이 많았다"고 말했다.
-당시로서는 미대 졸업 후 IBM 입사가 흔치 않은 선택 같은데요.
"디자인 수요가 많진 않았지만 공급도 적었고, 대학 졸업장이 취업을 어느 정도 담보해주던 시기였어요. 그러다 보니 밥벌이가 어렵진 않았죠. 졸업하면 대기업 몇 군데가 줄을 서 있었고, 졸업생의 약 90%가 광고대행사나 대기업 디자인실에 취직했으니까요. 아마 이때 삼성에서 제안이 왔다면 안 갔을 거예요. 하하하."
장 원장은 선배의 소개로 IT(정보기술) 회사인 한국 IBM에서 광고·홍보 일을 시작했다. 당시 회사에선 유일한 미대 출신이었다. 그는 커뮤니케이션 스페셜리스트로서 웹(web)이나 멀티미디어를 기반으로 한 공동 작업을 기획하고 팀원들의 작업물을 손보는 역할을 했다.
"(미대 출신이) 아무도 없으니 외롭기도 하고, 디자인과 나와서 이걸 하는 게 맞나 싶기도 했어요. (디자인 전공생에게) '평생 뭐했어?'라고 하면 '내가 직접 그린 거나 작업한 게 이거야'라고 보여주는데 저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컴퓨터 공학을 접할 좋은 기회였죠."
장 원장은 1991년 미국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 입학해 멀티미디어와 공학 등을 배웠다. 그는 "이때 배웠던 것들이 산업 현장에서의 이해도를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사진=김휘선 기자
"31세 때 울산대 시각디자인과 교수로 초빙됐는데, 2년 반 만에 미국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로 유학을 떠났어요. 80년대 후반 미국에서는 '포토샵 1.0', '일러스트레이터 1.0' 등의 컴퓨터 프로그램이 출시돼서 외국 유수의 디자인 대학들이 마침 이를 활용한 교과과정으로 처음 편성하고 있었거든요.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유학은 만족했나요.
"(시카고대) 시각디자인과에 입학했지만 관련 수업은 딱 1개 듣고 나머지는 멀티미디어, 공학 쪽 수업 많이 들었어요. 공학도만큼 깊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이후 산업 현장에서의 이해도를 높이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됐죠. 특히 한 학기 내내 만들었던 코딩(컴퓨터 프로그램 코드를 작성하는 것) 활용 작품은 잊을 수가 없어요. 지금이야 코딩이 많이 보편화했지만 당시에는 코딩 몇 줄 해서 주면 수백만 원을 받던 때였거든요."
-이후에도 직장을 여러 번 옮기셨죠.
"유학 이후 4년간 특수영상, 컴퓨터그래픽, 멀티미디어 전문회사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어요. 1990년대 중후반 우리나라에도 인터넷 환경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95년 이화여대 디자인학부 교수로 운 좋게 강단에 서게 됐죠. 그때만 해도 여기가 평생 직장이 될 줄 알았어요. 하지만 삼성전자에서 제의가 들어오면서 나이 50세를 앞두고 도전 의식이 '또' 불타오르더라고요. 남들이 (회사) 나올 때 들어간 셈이었죠."
-이직을 여러 번 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삼성은 사실 8번째 직장이에요. 이전까진 2~3년 주기로 직장을 많이 옮겨 다녔어요. 보통 처음 1년은 도전기간이고 2년이면 익숙해지고 3년이 되면 지루해져요. 울산대뿐만 아니라 이화여대 때도 '너무 빨리' 안정적인 곳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현장이 주는 도전 정신과 성취감을 좀 더 느끼고 싶었어요."
삼성 입사로 그는 '디자인 전문가'에서 '대기업 수장'이 됐다. 장 원장은 "사실 도서관에 가서 리더십 서적을 독파했다"며 "당시 디자인팀에 임원(상무)으로 들어갔는데 부장이 한 명도 없고 다 과장, 대리, 사원이었다. 시각과 공학을 둘 다 챙기면서 조직을 키워나가자고 했다"고 말했다. 이후 10년 동안 디자인팀은 인원 500명에서 1500명에 이르는 거대 조직이 됐다.
-조직을 키운 비결은 무엇이었나요.
"당시 시장 트렌드 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 사람들이 무엇을 고민하고 원하는지 알아봤는데, 그중 하나가 '편안함'이었어요. '예쁘게 만들자'가 아니라 '사용자 경험'을 중시한 걸 만들자고 생각했죠. 결과는 대박이었어요. '갤럭시 S3'은 애플 누르고 첫 세계 1등을 했죠. 갤럭시 '기어'와 '노트'도 디자인팀에서 처음 제안한 거고요. 큰 액정화면을 좀 작아 보이게 하려다 보니 플립커버가 출시되면서 모바일 액세서리 시장도 커졌습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2013년 미국 IT 전문 잡지 '패스트컴퍼니'(Fast Company)는 그를 '올해의 가장 창조적인 인물' 2위로 선정하기도 했다.
장 원장은 2018년은 '잠시 쉬어가는 해'라고 말하면서도 60세 이후 새로운 도전을 꿈꿨다. 그는 "아직 인생 삼모작이 시작하지 않았다"며 웃었다. /사진=김휘선 기자
"80년대와 비교하면 현재 디자인과나 인력이 3배 이상 늘었습니다. 사실상 포화 상태죠. 이럴 때일수록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새로운 것들에 대한 도전 의식이 가장 중요해요. 저는 남들이 안 간 쪽을 빨리 갔어요. 선점 효과를 노렸다기보단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죠. 요즘 젊은 디자인 전공생들을 보면 대기업 취직이나 공무원 임용이 최대 목표잖아요. 창업 의지는 별로 없더라고요. '나가면 고생'인 것은 맞지만 원래 처음 가는 길 중에 쉬운 길은 없어요."
장 원장은 지난해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총감독을 무보수로 맡았다. 그는 "무엇보다 내가 원해서 맡은 직책이었다"며 "'미래들'이라는 주제를 통해 지금 우리가 4차 산업혁명을 얘기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인간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세상이 원하는 것을 급하게 익히느라 정신없이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디자인이란 세상이 변하는 흐름을 쭉 타고 가는 거니까요. 어떨 땐 가끔 피곤하기도 하지만 그 안에 있으니 세상 돌아가는 걸 아니까 재밌기도 합니다. 보통 40세 중반까지 이모작, 60세까지 삼모작이라고들 하는데 저는 아직 이모작 중인 것 같아요. 아직도 현장에 있고 싶지만 일단 올해는 삼모작을 위한 준비기간으로 잠깐 쉬어가려고요. SADI 원장으로서 역할을 다하면서 사회적 기업같이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장동훈 원장 연보>
△1958년 서울 출생
△1983년 서울대 미술대 응용미술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84~1987년 한국IBM 커뮤니케이션 스페셜리스트
△1987~1989년 울산대 시각디자인과 교수
△1991년 미국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석사
△1991~1993년 시공테크 아트디렉터
△1993~1995년 포톤연구소 연구위원
△1995~2006년 이화여대 디자인학부 교수
△2006~2013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디자인팀장
△2014~2015 삼성전자 부사장
△2016~ SADI(삼성디자인교육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