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방위? 합의하시죠" 편의주의가 만든 무법지대

머니투데이 방윤영 기자 2017.12.1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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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당방위'는 없다②-1] 관행적으로 검찰에 판단 넘겨, 경찰 "수사인력 부족 탓"

/삽화=김현정 디자이너/삽화=김현정 디자이너


40대 남성 A씨는 지난 가을 경찰의 '편의주의'를 혹독하게 경험했다. 변호사를 선임해 대응한 끝에 단순폭행 혐의에서 벗어났지만 약 5개월간 겪은 마음 고생은 해소할 방법이 없다.

사건은 지난해 가을로 거슬러 올라간다. 새벽에 서울 한 유흥가 거리를 걷던 A씨는 술에 취한 남성 3명으로부터 아무 이유 없이 욕설을 듣고 폭행을 당했다. 이들에게 맞은 A씨 얼굴은 멍이 들고 코피가 났다.



결국 경찰서까지 갔는데 조사를 받던 남성들은 오히려 "A씨가 우리 어깨를 밀치고 폭행했다"며 쌍방폭행을 주장했다. 그러자 경찰은 A씨에게 '합의'를 종용했다.

경찰은 "술에 취한 사람들을 폭행한 것도 단순폭행 혐의가 적용될 수 있다"며 "원만히 합의해서 없던 일로 하는 게 어떠냐"고 말했다. 이어 "합의하지 않으면 쌍방폭행으로 입건 돼 벌금을 내게 된다"고 으름장을 놓기까지 했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남성 중 한명의 어깨를 밀친 것이 다였던 A씨는 경찰의 이런 태도에 화가 났다. A씨는 "폭행한 사람들은 다친 곳이 없는데도 합의를 종용하며 사건을 무마시키려는 경찰 행동이 너무 황당했다"고 토로했다. 검찰 조사까지 넘어가서야 A씨는 불기소(단순폭행에 대한 혐의 없음) 처분을 받았다.

경찰이 피해자에게 무턱대고 합의를 종용하고 정당방위 수준의 대처를 한 피해자를 쌍방폭행으로 입건한 일은 A씨만 겪은 것이 아니다. 하루에도 400여건씩 벌어지는 폭행 사건을 경찰이 적극 수사하지 않고 '편의주의'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김용대 신후 법률사무소 변호사도 "수사기관은 사회적 이슈가 되지 않는 사건인 경우 정당방위에 대한 법리 검토 없이 쌍방폭행으로 종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경찰 내부에서도 정당방위 판단을 유보하고 쌍방폭행으로 입건하는 것이 관행적으로 이어져 왔다고 말한다. 검찰이 수사하고 기소 여부를 정하도록 넘기는 식으로 일 처리를 한다는 설명이다.

한 일선서 형사과장은 "정당방위로 인정된 사례가 드문 탓에 경찰이 섣불리 판단을 내리지 않고 관행적으로 쌍방폭행으로 입건해 온 것도 사실"이라며 "다음 단계 수사기관인 검찰로 떠넘겨 온 측면도 있다"고 밝혔다.

편의주의가 고착화된 상황을 경찰은 기준이 애매모호한 정당방위 여부를 판단하려면 많은 수사력을 투입해야 하는데 그럴 여력이 없다고 해명한다.

한 일선서 수사 경찰관은 "매일 사건이 쏟아지는데 단순 폭행 사건까지 면밀히 들여다보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며 "합의를 이끌어 내 사건을 종결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정당방위 여부를 가려내려면 피의자뿐 아니라 목격자 진술, 주변 CCTV(폐쇄회로 화면) 등을 확보해 수사해야 한다.

지난해 기준 경찰관 수사 인력은 약 2만명 수준에 불과하다. 단순 폭행사건을 처리하는 수사관은 이 중에서도 일부다. 지난해 발생한 폭행 사건(16만5803건)을 기준으로 보면 수사관 1명이 폭행사건만 적어도 8건 이상 담당한 셈이다. 합의로 해결된 폭행 사건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전문가들은 정당방위를 규정하는 모호한 법 조항과 함께 수사기관의 관행적인 태도도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경찰에서 정당방위 수사 가이드라인을 만들었지만 실무 차원에서는 제대로 적용되지 못하고 있다"며 "정당방위에 대한 사법부의 태도변화뿐 아니라 수사기관도 함께 변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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