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전방위 통상압박에 제 역할 못하는 정부

머니투데이 머니투데이 최우영, 정혜윤 기자 2017.11.22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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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 업계 구제조치 대신 정부·업계 입장 전달만 주력…WTO 제소도 공염불 그칠 가능성 커

22일 서울 역삼동 한국기술센터에서 산업통상자원부 주최로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의 삼성전자, LG전자 세탁기에 대한 긴급수입제한조치(세이프가드) 권고안 발표 관련 민관 공동 대응 방안 마련 회의가 열리고 있다. /사진=뉴스122일 서울 역삼동 한국기술센터에서 산업통상자원부 주최로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의 삼성전자, LG전자 세탁기에 대한 긴급수입제한조치(세이프가드) 권고안 발표 관련 민관 공동 대응 방안 마련 회의가 열리고 있다. /사진=뉴스1


미국 ITC(국제무역위원회)가 수입 세탁기에 대한 세이프가드 권고안을 발표해 국내 업계에 피해가 예상되는 가운데 주무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는 정부와 업계의 입장만을 미국에 전달하는 등 소극적 대응에 그치고 있다. 산업부가 WTO(국제무역기구) 제소까지 검토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최근 중국의 사드 보복에 따른 무역 피해를 두고도 청와대의 의지에 따라 제소 방침을 접었던 만큼 미국에 대해서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산업부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산업부는 22일 서울 역삼동 한국기술센터에서 강성천 통상차관보의 주재로 삼성전자, LG전자, 외교부 수입규제대책반 등과 함께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는 ITC가 지난 21일(현지시간) 수입산 세탁기에 적용할 세이프가드 권고안을 발표한 데 따른 것이다. 권고안은 TRQ(저율관세물량)인 120만대를 넘어 수입되는 세탁기에 첫해 50%의 관세를 부과하는 내용을 담았다. 120만대에 대해서도 20%의 관세를 부과하고, 세탁기 부품은 사실상 모든 물량에 첫해 50% 관세를 부과하라는 내용도 담겼다.



회의에서는 ITC의 권고안이 시행되면 국내 세탁기 업계의 수출에 얼마나 차질을 빚는지 분석하고 세이프가드가 시행될 경우 입게 될 피해를 어떻게 최소화할지 등을 논의했다. 부품 수출 제한이 삼성과 LG의 현지 공장 운영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됐다.

정부와 업계는 우선 TRQ 물량 120만대에 관세가 부과되지 않도록 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잡았다. 그 다음으로는 △프리미엄 제품에 대한 관세적용 제외 △세이프가드가 발동될 경우 베트남 등 다른 나라와의 국제 공조를 통한 대응 △WTO 제소에 대한 법리 검토 등을 진행하기로 했다.



강성천 차관보는 “ITC의 세이프가드 권고안은 미국 소비자의 선택을 제한해 유감스럽다”며 “삼성과 LG 등 현지에 투자해 공장을 준공하고 미국 내 일자리를 만들 계획을 가진 기업들의 노력을 저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이 내년 2월초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 정부와 민간이 미국의 의회와 주정부 인사들을 만나 적극적으로 우리 입장을 설명할 것”이라며 “최종 결정 전 남은 두 달 동안 기업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업계와 함께 노력하겠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정부의 대응이 잇따른 미국의 통상 압박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산업부는 ITC가 지난달 6일 미국 월풀사의 피해를 인정한 뒤 한 달 반이 지날 때까지 우리측 입장만 전달했을 뿐 실질적으로 세이프가드 권고안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정부의 어정쩡한 대응은 비단 세탁기만이 아닌, 한미 FTA 재협상부터 최근 ITC가 발표한 한국산 태양광 모듈에 대한 세이프가드 권고안까지 이어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 같이 무책임한 대응이 계속된다면 앞으로 반도체, 철강, 화학, 자동차 등까지 관세 폭탄을 잇달아 떠안을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특히 정부가 분쟁이 터질 때마다 내미는 ‘WTO 제소’ 카드 역시 공허한 구호에 그칠 뿐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산업부는 중국의 사드 보복조치가 절정이던 지난달 6일 WTO 서비스무역이사회에서 중국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제소할 방침을 검토했지만, 청와대의 ‘WTO 제소 불가’ 발언에 따라 제소 검토 방침을 즉시 철회한 바 있다.

채 욱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WTO의 분쟁해결 절차가 예전에 비해 효과가 약해졌다 해도 정부는 할 수 있는 조치를 다 취해야 한다”며 “WTO 제소를 해야 다른 나라들과 공조할 가능성도 생기고 상대국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채 교수는 “너무 미국의 결정에만 의존하지 말고 다자체제를 잘 활용해서 힘을 발휘하는 정부의 조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구기보 숭실대 글로벌통상학과 교수는 “미국이 세탁기를 문제 삼는다면 우리는 한미 FTA 이후 피해를 입는 소고기 부문에 쿼터를 부과하는 등의 대응 카드를 만들어야 한다”며 “실제로 쿼터를 부과하는 것과 별개로, 이 같은 카드들이 미국의 강한 요구를 완화시킬 수 있다”고 바라봤다.

아울러 “다른 동남아 국가들은 미국 상대로 실제로 WTO 제소 카드를 사용하는데, 한국은 정치보복을 당할 것이라는 겁을 먹고 있다”며 “여러 학자나 전문가들이 이 카드를 협상에서 쓰라고 얘기하는데 이상하게 정부에서는 안 쓴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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