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추사고택을 가다

머니투데이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2017.11.18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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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고택 전경. /사진=이호준 여행작가추사고택 전경. /사진=이호준 여행작가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이른 아침에 찾아간 추사고택은 사람 발길 하나 없이 고즈넉하다. 아침 햇살과 참새 몇 마리가 마당에서 어울려 놀다가, 낯선 발소리에 화들짝 놀라 달아난다. 추사 김정희가 나고 자란 집은 터 자체가 안온하다. 부드럽게 품을 펼친 낮은 산을 뒤로하고 너른 들판을 앞에 두었다.

먼저 만나는 건 ‘ㄱ’자의 사랑채. 정갈하게 비질이 된 마당을 지나 너른 마루에 앉아 시선을 이곳저곳에 맡긴다. 추사도 어느 볕 좋은 날 이 자리에 앉아 있었을까? 오래전 머물다 간 천재 예술가의 생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사랑채의 구조는 비교적 단순하다. ‘ㄱ’자로 꺾이는 곳에 대청을 두고 온돌방이 남쪽에 한 칸, 동쪽에 두 칸 있다. 큰방이 추사가 머물던 곳이다. 방안에는 추사의 글씨로 만든 큰 병풍과 보료‧서탁이 놓여 있다.



추사의 궤적을 하나씩 그려본다. 추사고택은 김정희의 증조부 김한신이 영조의 사위가 되면서 하사받은 집이다. 김정희는 1786년 이 집에서 출생했다. 김정희를 낳을 때 우물이 갑자기 마르고 뒷산의 풀과 나무들이 모두 시들었다가, 그가 태어나자마자 우물이 다시 차오르고 나무와 풀들도 생기를 되찾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추사가 머물던 사랑채. /사진= 이호준 여행작가추사가 머물던 사랑채. /사진= 이호준 여행작가
추사 김정희는 고증학의 문호를 개설한 학자이며 문장가다. 글씨는 물론이고 그림에도 뛰어나 예술가로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금석학 연구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으며 천문학·지리학·문자학·음운학에 정통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질곡은 있었다. 1819년 문과에 급제해 규장각 대제‧호서안찰사를 거쳐 병조판서에 이르는 등 승승장구하던 중 예기치 못한 시련이 닥쳤다. 55세 때 윤상도 옥사에 연루돼 9년에 걸친 제주도 유배생활을 했다. 65세 때는 진종조예론(眞宗弔禮論)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돼 다시 2년간 함경도 북청에 유배됐다. 하지만 추사는 가장 절망적인 상황을 예술로 승화시켜 추사체라는 독특한 경지의 글씨를 만들었다. 훗날 ‘19세기 최고의 인물’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빛나는 삶이었으면서도, 눈물과 멀지 않았지만 스스로 불우를 딛고 불후의 작품들을 남긴 것이다. 불세출의 작품으로 천 년을 빛나는 삶 이상의 삶이 있을까.

집을 돌아보며 벽에 걸린 글씨들을 하나씩 눈에 담는다. 글씨마다 추사의 성품과 노력과 고난이 배어있다. 기둥에 걸린 주련에서도 그의 자취를 읽는다. 특히 ‘서세여고송일지(書勢如孤松一枝)’라는 문장 앞에서 오래 머문다. ‘글씨 쓰는 법은 외로운 소나무 한가지와 같다’는 뜻이다. 그도 그런 마음이었구나.

안채는 사랑채에 살짝 비켜서 있다. 사랑채가 동향인 데 비해 안채는 남향으로 자리한 ‘ㅁ’자 집이다. 6칸 대청에 안방‧건넌방‧부엌‧광 등을 갖추고 있다. 전체적으로 넓지는 않지만 이 곳에 살아온 사람들의 정갈한 마음을 엿보기에는 부족하지 않다. 그러고 보니 영조의 딸인 화순옹주가 머물던 집이기도 하다. 화순옹주는 김정희의 증조모다. 고요한 뒤뜰에는 나무에 앉았던 새소리가 우수수 떨어져 앉는다. 조금 올라가면 추사영실(秋史影室)이 있다. 거기서 추사의 초상과 마주한다. 얼굴 전체는 후덕해 보이고 표정은 온화하다. 특히 감춘 듯 은은한 미소는 보는 이의 마음을 평온하게 해준다. 목례로 작별하고 내려와 뒤뜰을 거닌다.


추사가 청나라에 다녀오면서 가져온 씨앗을 심었다는 백송. 두 가지는 말라 죽고 하나만 남았다. /사진=이호준 여행작가추사가 청나라에 다녀오면서 가져온 씨앗을 심었다는 백송. 두 가지는 말라 죽고 하나만 남았다. /사진=이호준 여행작가
고택을 나서서 왼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소나무 숲을 지나고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 묘도 지나고 화순옹주 홍문을 거쳐 백송을 보러 간다. 이 백송은 추사가 25세 때 청나라 연경을 다녀오면서 가져온 씨앗을 고조부 김흥경의 묘소 앞에 심은 것이라고 한다. 밑에서부터 세 가지로 자란 아름다운 모양이었지만 두 가지는 말라 죽고 한 가지만 남았다. 그나마도 늙고 쇠잔해서 연명으로 위안 삼는 것 같다.

길을 되짚어 나와 마지막으로 추사의 묘소에 들른다. 묘소는 봉분도 높지 않고 석물들도 고만고만하다. 하지만 범접하지 못할 기품을 갖추고 있다. 소나무 한 그루가 청청한 기상으로 추사를 말해준다. 나무 그늘에 앉아 멀리 눈길을 던진다. 텅 비어서 더욱 가득 찬 들판이 끝없이 출렁거린다. 사람 사는 것도 그렇지. 비우고 또 비워서 알차게 채울 일이다.

[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추사고택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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