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털기 당하는 판사들…"여론 재판 하란거냐"

머니투데이 양성희 기자 2017.11.10 14:57
글자크기

[theL]

삽화=임종철 디자이너삽화=임종철 디자이너



"OOO부장판사 너희 아버지 아니야? 지금 실시간 검색어 1위야."

#. 판사 아버지를 둔 고등학생인 A군은 '3년 전 그날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하다. 교실에 있던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 인터넷창을 보여주며 확인을 구했기 때문이다. 당시 형사합의재판부를 이끌던 A군의 아버지는 사회적 관심도가 높은 사건에서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증거 부족이 이유였다. 아버지를 향한 비난 일색의 글은 지금도 A군에게 상처로 남아있다.

법원의 결정이나 판결 결과에 따라 사건을 심리한 판사를 향한 '신상 털기'가 이뤄지고 과도한 비난 여론이 들끓는 데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판사들 사이에선 "여론 재판을 하라는 것이냐"는 하소연이 나온다. 영장 전담을 꺼리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10일 이명박정부의 '공영방송 장악'과 관련, 김재철 전 MBC 사장이 법원의 영장 기각으로 구속을 면하자 사건을 맡았던 서울중앙지법 강부영 영장전담 판사의 이름이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 네티즌들은 강 판사의 출신, 경력 등은 물론 배우자의 신상까지 인터넷상에서 공유했다.

이 같은 일은 주요사건에 대한 영장실질심사(구속 전 피의자 심문)나 판결 선고 결과가 나올 때마다 되풀이된다. '가짜뉴스'가 떠돌 정도로 비난 여론이 비등하다. 지난 1월 서울중앙지법 조의연 당시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하자 '아들이 삼성 취업을 약속받았다'는 루머가 돌았다. 조 판사에게는 아들이 없다.



이렇다보니 사법부의 최고 수장까지 공적인 자리에서 '법관의 독립'을 우려하는 상황이다. 헌법과 법률에 근거한 비판이 아닌 이해관계나 입맛에 따른 비난이 이어지는 데 대한 걱정을 내비친 것이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지난달 취임 한달을 기념해 진행한 기자간담회에서 "재판 결과는 법치주의 정신에 따라 존중돼야 하며 법원을 향한 과도한 비난은 적절하지 않다"고 당부했다.

이에 앞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도 지난 9월 6년의 임기를 마치고 사법부를 떠나는 자리에서 "재판 결과가 자신이 원하는 방향과 다르기만 하면 도를 넘은 비난이 다반사로 일고 폭력에 가까운 집단적인 공격조차 빈발한다"며 "사법부가 당면한 큰 위기이자 재판의 독립이라는 헌법 기본원칙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라고 말했다.

일선 판사들도 한숨이 깊다. 서울의 한 부장판사는 "판사는 오로지 헌법과 법률에 따라 법적인 판단을 할 수밖에 없는데 다른 잣대로 공격을 받으면 사법체계가 부정당하는 기분이 든다"며 "재판의 독립, 사법부의 독립은 국민도 지켜줘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도저히 법적으로 유죄를 인정할 수 없는 경우 판사들도 '이런 결정을 내리면 내 신상이 탈탈 털리겠지'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는데 그걸 알면서도 어쩌겠느냐"며 "법대로 판결하는 것이 판사의 숙명"이라고 했다.


비난의 정도가 과하다보니 법원 내에선 영장 전담이나 형사 재판을 맡기를 꺼려하는 분위기도 생겼다. 한 형사 단독 판사는 "누군가의 생각과 다른 결론을 내렸다는 이유만으로 판사에게 인신공격적 비난이 가해지고 있는 상황인데 여론 추이까지 예상해서 재판을 하라는 것이냐"며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영장 전담은 물론이거니와 형사 재판을 맡기가 꺼려진다"고 털어놨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