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면칼럼]사장 60세·회장 65세

머니투데이 박종면 본지 대표 2017.10.30 03:07
글자크기
굳이 ‘주역’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의 하나가 언제 나아가고, 언제 물러날지를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이다. 이게 쉽지 않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그렇다.



춘하추동처럼 인생은 생로병사다. 세상에 태어나 한바탕 실컷 놀고 나서는 뒤에 오는 사람들을 위해 자리를 양보하고 물러나는 것이 삶의 정석이다. 나이가 들면 떠나야 한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이미 가진 것을 놓지 않으려 한다. 나이가 들수록 앞으로 살아갈 날이 유한한데 뒷걱정은 무한한 게 인간이다. 권력도 돈도 움켜쥐고는 놓지 않으려 애를 쓴다. 바로 노욕이고 노추다.

옛 성현들은 “젊어서는 색을 경계하고 중년에는 다툼을 경계하며 노년에는 이미 얻은 것을 경계하라”고 가르친다. 미적대고 미련을 못 버리다 보니까 인생이 올라가기는 쉬워도 내려오는 게 어려워진다. 그러다 어느 날 황망히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런 노욕과 노추의 길을 거부한 경영자가 있다. 삼성전자가 3분기 사상 최대 분기 실적을 발표한 날 전격적으로 사의를 밝힌 반도체 신화의 주인공 권오현 부회장이다. 권오현 부회장은 삼성전자 대표이사직과 의장직, 디스플레이 대표이사까지 맡아 삼성그룹에서 오너인 이재용 부회장 다음 가는 실권자다.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으로 경영공백 상태가 지속되는 현실을 감안하면 권 부회장의 사퇴선언이 보기에 따라서는 무책임하거나 순진하고 낭만적인 의사결정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권 부회장은 “인사를 하지 못한다는 건 회사에 피가 돌지 않는다는 의미며, 회사의 활력이 사라져가는 것을 보면서 스스로 변화의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전적으로 맞는 말이다. 국가도 기업도 인사가 만사다. 조직이 생기 있게 돌아가느냐, 아니냐는 오로지 인사에 달렸다.

삼성은 2000년대 들어 사장은 만 60세, 부회장은 만 65세를 기준으로 이때까지만 현역에서 일하는 것을 관행처럼 지켜왔다. 그러던 것이 2014년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후에는 제대로 인사가 이뤄지지 못했다. 더욱이 이재용 부회장이 구속 수감되고 미래전략실까지 해체되면서 경영진 인사가 사실상 올스톱 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올해 만 65세인 권 부회장은 자신이 스스로 물러나는 패를 던짐으로써 지금과 같은 폐색(閉塞)의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이다.


반도체가 슈퍼사이클 국면에 와 있고 삼성전자 전체적으로 사상 최대 이익을 내고 있는 데다 이재용 부회장이 수감된 상황까지 감안하면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2~3년 더 자리를 지키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권 부회장은 자리를 과감히 던져버렸다. 그는 오래 전부터 고민한 결과라고 말했다.

그는 사퇴선언 후 미국 ‘워싱턴경제클럽’에 참석해서는 ‘가장 정상에 있을 때 내려오라’는 말을 소개하는가 하면 퇴임 후 스타트업 멘토링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가장 눈부신 순간에 스스로 목을 꺾는’ 동백꽃처럼 ‘단호한 참수’를 실행한 그에게 ‘붉은 감탄사’를 내뱉을 수밖에 없다.

몰신이이(沒身而已), 자기 시대가 끝났다면 소리 없이 물러나 초목처럼 살아야 한다. 70세를 넘기고 심지어 80세를 눈앞에 둔 전직 고위관료들이 금융협회장직 등을 차지하겠다고 나서는 걸 보는 건 슬픈 일이다. 사람마다 정신적·육체적 건강상태가 다른 만큼 예외는 있어야겠지만 ‘사장 60세·회장 65세 정년’ 관행을 삼성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 기준으로 삼는 건 어떨까.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100세 시대가 되면서 우리는 인생을 정리하고 마무리하는 일에 소홀해지고, 심지어 잊고 산다. 그러나 누구나 죽는다. 죽는 순서도 없다..
TOP